[사진의 기억] 중절모와 아이스케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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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2호 31면

중절모, 전북 고창, 1975년 ⓒ김녕만

중절모, 전북 고창, 1975년 ⓒ김녕만

모자 위에 모자를 눌러쓴 할아버지를 보았을 때 뜬금없이 어린 시절의 소망이 떠올랐다. 길거리에서 양손에 각각 ‘아이스케키’ 하나씩 들고 번갈아 가며 이쪽저쪽 한 번씩 맛있게 빨아먹는 친구가 얼마나 부러운지 나도 꼭 그렇게 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긴 여름이 다 가도록 양손에 아이스케키를 쥐어 보겠다는 나의 소박한 소망은 그냥 잊히고 말았다. 모자 두 개를 쓴 할아버지도 나와 같은 심정이었을까. “돈을 모아서 이번 장에는 기필코 챙이 넓은 모자와 점잖은 중절모를 한 번에 장만해보리라”하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시골 장터나 거리에서 흰옷에 중절모를 쓴 할아버지를 만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우리에겐 의관을 정제하는 오랜 전통, ‘의(依)’가 앞서는 ‘의식주’ 문화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전통 때문인지 맨머리로 외출하기를 어색해하셨던 할아버지는 집 밖에 나가시려면 모자부터 먼저 찾아들었다. 그리고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횃대에 모자와 의복부터 가지런히 걸어 놓으셨다. 예전에는 체면을 목숨처럼 중하게 여기시는 어른들이 참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체면 따위는 내팽개친 세상에 이르니 항상 의관을 정제하고 곁불은 쬐지 않고 찬물 먹고도 이 쑤시는 꼿꼿한 정신을 이젠 이해할 수 있겠다. 밥은 굶어도 시시해 보이기는 싫은 자존심이 아니었을까.

50년이 흐른 지금 이 사진을 다시 보니 두 할아버지의 조화가 재미있다. 한 분은 동그란 안경에 비스듬히 쓴 모자, 담배를 입에 문 느긋한 자세가 한량의 풍모다. 그 옆에 모자를 겹쳐 쓰고 지갑을 들여다보고 있는 할아버지는 핸드폰에 열중하는 요즘 시대 엄지족 같은 모습이다. 아침에 함께 장에 나온 할머니를 기다리는지 아니면 집에 돌아가기 전에 막걸리 한 잔을 같이 마실 친구를 기다리는지 두 분 다 일어설 기미가 없다. 문득 중첩된 중절모가 일깨워주는 잊었던 나의 소망, 늦었지만 올여름에는 이루어봐야겠다.

김녕만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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