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중국’ 인증 경쟁에 뛰어든 대만 연예인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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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록밴드 메이데이(五月天)의 메인 보컬 아신(阿信)(오른쪽). 페이스북 캡처

대만 록밴드 메이데이(五月天)의 메인 보컬 아신(阿信)(오른쪽). 페이스북 캡처

대만은 아시아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공화국이다. 하지만 ‘하나의 중국’이란 대륙 중국의 만만찮은 압력에 시달리고 있기도 하다. 대륙을 시장으로 삼아 먹고 살아야 하는 예술인과 기업인들의 딜레마는 더욱 크다.

베이징에 오면 우리 중국인은 꼭 오리구이를 먹습니다.

지난 5월 24일 대만 록 밴드 메이데이(五月天) 베이징 콘서트 현장에서 메인 보컬 아신(阿信)이 이렇게 말을 꺼냈다. 핵심은 ‘우리 중국인’이란 표현이다. 중국 팬들의 환호성이 쏟아졌다. 이 발언은 이날 중국판 SNS인 웨이보(微博) 인기 검색어 순위에 올랐다. 같은 날 중국 장시성 난창(南昌)에서 열린 콘서트에서 대만 가수 차이이린(蔡依林)은 “우리 중국 난창이 가장 열정이 넘칩니다. 맞죠?”라고 외쳤다.

이처럼 최근 대만 연예인들이 중국 팬들에게 ‘하나의 중국’을 외치는 사례들이 연달아 일어나고 있다. 중국 본토의 ‘양안 통일’ 여론 압박에 중국에서 활동하는 대만 연예인들이 일종의 정치적 발언을 하는 양상이다.

이런 풍조의 발단은 중국 관영 방송인 CCTV가 라이칭더(賴淸德) 대만 신임 총통의 발언을 문제 삼으면서 시작됐다. 중국 매체들은 지난 20일 라이칭더의 총통 취임사를 전하지 않았다. 이틀 후인 22일에 CCTV가 라이칭더를 저격했다. “대만은 한 번도 독립 국가인 적이 없으며 영원히 그렇게 될 수 없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라이칭더는 취임사에서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은 서로 예속돼 있지 않다”고 말했다. CCTV가 이를 ‘독립 국가’ 주장으로 해석해 제대로 문제를 삼으려고 나선 것이다.

20일 대만 총통부 앞에 마련된 무대에서 라이칭더 신임 총통이 취임 연설 중 주먹을 굳게 쥐어 올리고 있다. 대만 총통부 제공

20일 대만 총통부 앞에 마련된 무대에서 라이칭더 신임 총통이 취임 연설 중 주먹을 굳게 쥐어 올리고 있다. 대만 총통부 제공

CCTV의 서슬 퍼런 ‘대만 독립 반대’ 성명은 곧바로 대만 연예계에 파문을 일으켰다. 많은 대만 연예인들이 앞다퉈 공개 석상에서 ‘우리 중국’이라고 말하거나 CCTV의 성명을 자신의 웨이보 계정에 공유하며 ‘친중 인증’을 이어갔다. 그러자 CCTV가 기다렸다는 듯 반응했다. 해당 성명을 공유한 대만 연예인 18명의 SNS 화면을 캡처한 이미지를 자사 웨이보에 올리며 친중 인증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같은 날 중국 온라인에선 ‘대만 연예인 입장 표명 실시간 현황표’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날 기준 대만 연예인 78명이 친중 입장을 밝힌 것으로 집계됐다. 소위 ‘샤오펀훙(小粉紅)이라 불리는, 중국 공산당 정권에 충성한다고 과시하는 청년들은 입장을 밝히지 않은 대만 연예인 94명의 명단을 공개하며 비난에 나섰다.

결국 라이칭더 총통이 이 사태에 대해 입을 열었다. 26일 “중국 진출 대만 문화예술인이 정치 입장 표명을 강요받는 일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고 마지막도 아닐 것”이라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말보다는 그들의 마음이 더 중요하다”며 대만 국민들에게 중국 당국의 압력을 받는 연예인들의 심정을 헤아려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여당인 민진당 정부를 비판해 온 야권도 이번 사안에선 모처럼 일치된 반응을 보였다. 제1야당인 국민당 소속 쉬위전(許宇甄) 입법위원(국회의원)은 중국에 대만 연예인에 대한 ‘마녀사냥’을 멈추라고 촉구했다. 다른 야당인 민중당도 성명을 내고 “대만 연예인들에게 입장 표명을 강요하는 중국의 행보는 양안의 민심을 더 멀어지게 하는 역효과를 일으킬 뿐”이라고 비판에 합류했다.

중국의 ‘정치 입장 표명’ 강요는 연예계만 국한하지 않는다. 앞서 대만 전자제품 제조사 HTC, 유리가공업체 ‘타이붜(台玻·대만유리)’, 부동산 업체 ‘샹린(鄉林)건설’ 등 다수 중국 진출 기업도 앞서 통일 의제와 관련해 중국 당국에 동의하는 입장을 밝혔다. 대만 경제매체 차이신미디어 셰진허(謝金河) 회장도 이번 ‘연예계 입장 표명 강요’ 사건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그는 “다수 연예인이 수익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입장을 밝히고 있다. 유명인일수록 더 큰 압박감을 느낄 것”이라며 “기업들도 똑같은 압박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외국 기업들이 중국에서) 돈을 벌기 시작하면 필연코 중국 정치계와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이는 중공 체제에서 불변의 법칙이며 예외는 없다”고 덧붙였다.

반면 중국에 대해 다른 견해를 밝혀 반중 성향 대만 네티즌들의 환호를 받고 있는 연예인도 있다. 대만 배우 원성하오(温昇豪)는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남겼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패망한 청나라는 대만을 일본에 양도했다. 당시 대만 사람들은 힘을 합쳐 일본에 반기를 들었다. 129년이 지났지만 여러 세력이 대만 땅을 호시탐탐 노리는 상황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지금도 대만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이 땅을 대하고 있다. 그 속에서 반복적으로 스스로에 벌을 내리기도 한다. 미래가 보이지 않으면 400년 전 과거, 이 땅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것도 방법이다.”

대한민국과 중화민국(대만)은 공통점이 많다. 비슷한 시기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 통치를 경험했다. 해방 후엔 공산주의 정권과 체제 경쟁을 이어왔다. 그 와중에 세계가 놀랄 정도의 경제 발전을 이룩했다. 정치적으론 정당 간 극심한 이념 대립을 겪고 있다. 지금 대만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남 일 같지 않은 이유다.

차이나랩 이충형 특임기자(중국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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