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승현의 시선

사람에 속고 시스템에 울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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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승현 기자 중앙일보 사회 디렉터
김승현 사회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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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 법률안은 다수당의 정파성이 입법부의 숙의 절차를 집어삼킨 결과로서 헌법상 민주주의 원리를 크게 훼손하였습니다.”

법무부가 지난 21일 내놓은 보도자료의 일부다. ‘채 상병 특검법안’을 통과시킨 국회에 재의를 요구하기로 의결한 국무회의 결론과 그 법리를 정리한 것이다. ‘위헌적인 특검 법안에 대한 국회 재의요구, 국무회의 의결’이라는 제목의 문건은 크게 네 가지 논거로 대통령의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요약하면 1. 여야 합의 없이 처리된 법안은 후보 추천권까지 더불어민주당에 줘서 대통령의 특별검사 임명권을 침해하고 2. 기존 수사기관이 수사를 해보지도 않고 특검을 도입한 전례가 없으며 3. 고발 당사자인 민주당이 검사나 판사를 정하는 것과 같은 불공정을 초래한다는 것이었다. 네 번째 논거는 서두의 문장이다.

야당에 반감 드러낸 법무부 자료
사람에 충성하는 시스템 만연해
신파극 주인공처럼 국민은 울분

대통령 거부권 행사의 법리를 고개를 끄덕이며 읽던 중 이 문장에서 목구멍에 뭐가 걸린 느낌을 받았다. 숙의 절차를 ‘집어삼켰다’고? 법령과 제도, 공소 제기 등을 주로 다루는 법무·검찰의 자료에선 본 적 없는 낯선 서술어는 쉽게 집어삼켜지지 않았다. 법령을 분석하고 평가한 법무부 자료에 왜 거대 야당의 독주와 정파성을 더 부각하기 위한 수사법이 사용됐을까.

국민의힘이 만든 자료라면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법안의 위헌성을 조목조목 따지기 위한 것이라면 가급적 냉철하지 않은 표현은 삼가는 게 기본이다. 우리 정부 안에서 사소한 것 같지만 사소하지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스쳐 갔다. 평정심을 잃은 공적 자료는 법안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본래의 목적을 퇴색시키고 국가의 시스템이 감정적으로 움직인다는 의심만 키우게 된다.

매일 기사를 쓰면서 갈등을 다루는 기자들은 서술어 하나에 담긴 감정과 평가, 선입견에 민감하다. 한 사람, 또는 한쪽 편을 든다는 의심이 드는 표현은 독자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한다. 우리 사회도 공적 시스템의 공정성이 의심받는 순간, 수십 년의 공든 탑이 무너지고 퇴보하는 경험을 숱하게 하지 않았던가.

최근 한국 사회의 여러 갈등도 사람과 시스템을 헷갈리는 데에서 비롯되고 있다. 의대 증원을 둘러싼 의료계와 정부의 갈등도 그중 하나다. 증원 규모 2000명이 시스템의 작동에 의한 것이라는 정부와 개인의 독단이라는 의료계가 무한대립을 하고 있다. 의대 증원 집행정지 신청이 법원에서 기각되기는 했지만, 재판부 역시 그 숫자가 시스템에 의해 도출된 것인지에는 의심을 품었다. 법원은 “2000명이라는 수치 자체에 관한 근거는 다소 미흡한 것으로 보이나, 의사인력이 부족해진다는 점에 관해서는 일응 근거가 있다”라고 판시했다. 시스템보다는 사람의 입김에 더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여지를 법원도 포착한 것이다.

대통령 거부권의 시작점인 채 상병 사망 사건의 진위도 사람과 시스템이 뒤섞여 혼란스럽다. ‘이런 일로 사단장을 처벌하면 대한민국에서 누가 사단장을 하겠냐’며 윤 대통령이 격노했다는 의혹이 핵심 쟁점이다. 대통령의 격노가 사실이라면, 군 시스템의 안정성을 지키려고 했던 사람의 지시가 오히려 시스템을 뒤흔드는 아이러니한 결과에 이르렀다. 공수처와 경찰 등 기존 수사 시스템을 믿자는 여권과, 못 믿겠으니 특별검사에게 맡기자는 야권의 갈등 또한 시스템과 사람에 대한 불신을 표출하고 있다.

거대 야당도 사람과 시스템이 뒤죽박죽이다. ‘미애로합의봐’(국회의장은 추미애로 합의 봤다는 의미를 음료수 이름에 빗댄 표현)로 불리는 22대 국회 전반기 의장 선출 과정을 보라. 의회주의를 최고의 가치로 삼아야 할 다수당 정당 대표와 국회의원들은 그 대표자인 국회의장을 당권 세력의 전리품으로 격하시켰다. 추미애 의원이 아닌 우원식 의원이 국회의장에 당선되는 이변이 벌어졌지만, 상황은 여전히 못 미덥다. 우 의원이 당선 소감에서 “국회의장은 단순한 사회자가 아니다”라며 “국회법이 규정한 중립의 협소함을 넘어서겠다”고 한 말에선 국회의장 시스템을 제대로 구현할 준비가 느껴지지 않는다. 특정인 중심으로 돌아가는 거대 야당의 의회 폭거를 걱정하는 건 기우일까.

이렇듯 국민은 시스템의 실패에 노이로제를 겪고 있다.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로 국민을 감동하게 했던 사람이 대통령이 된 이후에 벌어지는 일이기에 좌절감은 더 크다. 뻔한 줄거리의 신파극을 보는 것처럼,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의 여주인공 홍도처럼, 국민은 무력감에 빠져 있다. 사람에 속고 시스템에 울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