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치문의 검은 돌 흰 돌] 바둑선생 황인성의 유럽 개척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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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황인성씨(오른쪽)와 아마5단 실력의 부인 이세미씨, 그리고 딸 엘리. [사진 한국기원]

황인성씨(오른쪽)와 아마5단 실력의 부인 이세미씨, 그리고 딸 엘리. [사진 한국기원]

봄의 유럽은 온통 축구 얘기다. 도시를 벗어나면 끝없이 펼쳐지는 초록의 평원과 아름다운 동네들이 보인다. 멀지 않은 곳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좀체 믿어지지 않는다. 이곳에서 바둑도 숨을 쉬고 있다. 유럽에서만 바둑대회가 매년 500개 넘게 열린다. 자그마한 대회지만 참 열심이다. 프랑스에 오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황인성(41)씨다.

황인성이 프랑스의 알프스 자락인 그르노블에 자리 잡은 지도 어언 10년. 이곳에서 바둑을 가르치며 아내 이세미씨, 딸 엘리와 함께 프랑스는 물론 유럽 전역을 누볐다. 그는 최근 대회에 다시 출전하기 시작해 유럽랭킹 1위에 복귀했다. 유럽의 메이저 대회에서 27번 우승했고, 프랑스 바둑연맹과 스위스바둑협회 공식 사범이란 직함을 갖고 있다. 그런 실력과 권위를 바탕으로 ‘연구생 도장’이란 시스템을 잘 이끌어 온라인에서 150명 넘는 제자들을 가르친다. 수입의 일부(3000유로)를 떼어내 딸의 이름을 딴 ‘엘리컵’이란 대회도 열고 있다. 시상은 반드시 엘리가 한다.

서양에서의 바둑 보급은 어렵다. 한때 정부의 지원을 받은 프로기사들이 대거 도전했으나 지금은 모두 철수했다. 오직 아마추어인 황인성 부부와 여자 국수였던 윤영선 8단만 남았다. (윤영선은 독일 남자와 결혼하여 독일 함부르크에 정착했다.)

황인성의 성공은(본인은 이제 시작이라지만) 현지 문화에 대한 이해로부터 출발한다. 그가 오래전에 소개한 일화가 지금도 생생하다.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는 프랑스로부터 독립전쟁을 벌이던 알제리에게 독립지원금을 전달했다. 이 반역 행위를 처벌하자는 사람들에게 당시의 드골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놔두게. 그도 프랑스야.”

서로 다른 것을 받아들이는 톨레랑스, 그리고 강한 자존감이 느껴지는 일화다. 바둑 사범이 10급 실력자를 7급으로 만들기는 쉽다. 그러나 바둑을 모르는 사람을 바둑으로 이끄는 일은 현지 언어와 문화에 대한 이해 없이는 힘들다.

유럽에선 프랑스·독일·영국·네덜란드가 전통적인 강자다. 바둑팬은 10만~15만명으로 추산되지만 그건 정확하지 않고 독일과 프랑스에서 연맹에 연회비 70유로(약 10만원)를 내는 사람들의 수는 각각 1000~1500명 정도라고 한다. 이 숫자에 10을 곱하면 팬의 숫자가 나온다. 프랑스의 바둑팬은 1만5000명이란 얘기다.

최근의 추세는 서유럽보다는 동유럽이 활발하다. 실질적인 최강자이자 가장 바둑을 많이 두는 나라는 러시아다. 체스에 이어 바둑에서도 러시아가 유럽 최강이라는 인식을 갖게 하기 위해 정부가 지원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 선수의 출전이 금지됐다.

AI의 등장은 유럽 바둑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을까. 놀랍게도 유럽은 아직 무풍지대다. 황인성은 바둑 보급에서 AI가 활용되는 사례는 거의 없다고 한다. 다만 중급 이상의 실력자들이 대회가 끝나고 나면 AI를 통해 바둑을 복기하는 게 흔한 일이 되었다.

AI가 유럽에도 고수를 양산해 내지 않을까. 동아시아에 필적하는 독학의 고수가 출현할 수 있지 않을까. 현재로는 그런 기대는 접어야 할 것 같다. 알파고를 바둑에 접목한 세대가 기존의 고스트 바둑왕 세대에게 밀리는 게 현실이다.

황인성이 사는 그로노블로 돌아가 보자. 그로노블은 인구 15만에 불과하지만, 유소년 바둑 열기가 유럽에서 가장 뜨겁다. 그 중심에 중학교 과학교사 죠세가 있었다. “빈부와 상관없이 여러 계층의 아이들이 순수하게 어울리는데 바둑이 최고다.”

죠세는 자신만의 철학으로 지방 정부의 협조를 이끌어냈다. 황인성에게 큰 힘이 됐다. 이제 바둑을 가르치지는 않지만, 엘리의 대부가 되어 서로 한가족처럼 지낸다.

“그로노블의 바둑클럽은 40년 역사를 자랑하는데요. 클럽에 가면 낭만적인 프랑스 바둑의 향기가 느껴집니다. 바둑의 높이만을 재던 나에게 바둑의 넓이를 알려주었죠.” 황인성의 말에서는 자부심이 묻어난다.

박치문 바둑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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