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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신복룡의 신 영웅전

유엽의 충고, 남자는 입이 무거워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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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촉한(蜀漢)의 건흥 4년(서기 230년), 전란에 피로해지고 건강마저 잃은 제갈량이 허술한 틈을 보이자 위나라 대장군 조진(曹眞)이 황제 조예(曹叡)에게 촉을 공략할 것을 아뢰었다. 이에 조예가 장사(長史) 유엽(劉曄)에게 의견을 물으니 좋은 계책이라고 대답했다. 조예가 기뻐하며 그러리라고 결심했다. 그런데 유엽이 대궐을 나오자마자 동료 신하들이 황제가 촉을 치기로 했다는데 사실이냐고 물었다. 난감한 유엽은 그런 일이 없다고 딱 잡아뗐다.

신영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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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대신들이 황제를 찾아가 “황제는 촉을 공략하기로 결심했다고 말하고 유엽은 그런 일이 없다 하니 군신 사이에 어찌 이렇게 말이 다를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당황한 황제는 유엽을 불러 “방금 촉을 치기로 나와 약조해 놓고 이제 신하들에게 그런 일이 없다고 대답하니 어찌 된 일이오”라고 책망했다. 그러자 유엽이 대답하기를 “지금은 촉을 칠 때가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조예는 그 뜻을 알고 신하를 물리친 다음 다시 촉을 쳐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를 물었다.

그제야 유엽이 대답하기를 “한 나라를 침공하는 일은 국가의 대사인데 알아야 할 사람이 있고, 몰라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폐하께서는 그 중차대한 사실을 저와 말이 끝나기도 전에 흘리셨습니까. 무릇 병법은 속임수입니다(夫兵者 詭道也). 그러하오니 주군은 마땅히 입이 무거워야 합니다.” 그 말을 들은 황제는 크게 후회하며 언행을 조심했다. (『삼국지』 99회)

지금 한국 정치는 살얼음 위를 걷는 것처럼 아슬아슬하다. 대통령과 야당 당수가 만나 할 말 못할 말을 나눴을 것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정신 나간 사람들이 나타나 “우리가 그 자리를 주선했다”고 기자 회견을 했다. 인간의 공명심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남자는 모름지기 입이 무거워야 하는데 세상이 어지럽다 보니 별짓을 다 보겠다. 이후락의 말처럼 밀사는 입이 없다.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