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안혜리의 시선

대통령의 확신, 불안한 복지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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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총선을 앞둔 지난달 1일 윤석열 대통령은 의료 개혁과 관련한 51분의 생방송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면서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이 근거가 있고 의료계와 충분한 논의를 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의료계에선 정반대의 소리가 나온다. 서울역 대합실에서 시민들이 지켜보고 있다. 연합뉴스

총선을 앞둔 지난달 1일 윤석열 대통령은 의료 개혁과 관련한 51분의 생방송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면서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이 근거가 있고 의료계와 충분한 논의를 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의료계에선 정반대의 소리가 나온다. 서울역 대합실에서 시민들이 지켜보고 있다. 연합뉴스

"국민 여러분, 전공의들의 집단행동으로 얼마나 불편하고 불안하십니까?"

4·10 총선을 코앞에 둔 지난달 1일, 정부가 자초한 의료대란으로 국민적 피로감이 쌓여가던 와중에 갑작스럽게 마련된 윤석열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는 이렇게 국민 공감으로 포장한 전공의 비판으로 시작했다. 대통령은 이날 생방송 51분의 상당 부분을 의대 증원 2000명과 관련해 갈등을 빚고 있는 의사 집단 비판에 할애했는데, 핵심은 "억울하다"는 거였다. 정부 결정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다양한 의료 단체는 이를 수차례 협의해놓고는 자기 밥그릇 챙기느라 환자 내팽개친 무책임한 의사들이 그런 적 없다며 오히려 정부를 비난하고 있어 직접 국민에게 설명한다는 주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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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에서는 정부가 주먹구구식, 일방적으로 2000명 증원을 결정했다고 비난합니다. 정부가 꼼꼼하게 계산하여 산출한 최소한의 증원 규모이고, 결정하기까지 의사단체를 비롯한 의료계와 충분하고 광범위한 논의를 거쳤습니다. …논의가 부족했다는 일부 의료계의 주장은 사실을 왜곡한 것입니다. 의료현안협의체, 의사인력 수급추계 전문가 포럼,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보정심)와 산하 의사인력전문위원회 등 다양한 협의 기구를 통해 37차례에 걸쳐 의사 증원 방안을 협의해 왔습니다. 의사인력전문위원회에서는 무려 9차례에 걸쳐 증원 규모, 의대 정원 확대 '규모'와 의대 교육 역량 등을 논의했습니다. …정부는 확실한 근거를 갖고 충분한 논의를 거쳐서 2000명 의대 정원 증원을 결정했습니다. " (담화 일부)

"근거·논의 충분" 대통령 담화 후
법원 자료 요청에 정부 우왕좌왕
쓸데없는 밀실 논란 자초한 측면

담화에 앞서 2000명 증원이 결정된 2월, 그러니까 기재부가 예산 배정을 하기도 전부터 이런 정부의 정당성을 국민에게 알리겠다며 예비비를 미리 끌어다 90억원의 홍보비까지 썼다.

일반 국민은 대부분 그러려니 했겠으나 당사자인 의사 집단과 이를 취재해온 언론은 대통령의 강경한 어조의 담화에 의아했다. 증원 규모를 놓고 이런저런 추측이 나오긴 했지만 2000명이란 파격적인 숫자가 처음 공개된 건 조규홍 복지부 장관이 이를 공식 발표한 지난 2월 6일 당일이었기 때문이다. 형식상 발표 1시간 전에 보정심 회의를 거치기는 했다. 하지만 위원들은 사전에 숫자와 근거자료를 공유 받기는커녕 회의에 들어가서야 2000이란 숫자를 처음 봤다고 한다. 보정심 뿐 아니라 의료현안협의체에서도 숫자에 대한 논의 자체가 없었다. 서울의대 교수협의회 비대위는 이틀 뒤 '담화문 팩트 체크'를 발간해 대통령 발언을 조목조목 따져가며 "정부가 꼼꼼하게 계산했다면 산출 과정을 공개해 달라"고 요구했다. 또 "복지부와 의료계가 만났지만 '규모' 논의는 한 번도 없었다"고 주장했다.

증원을 둘러싼 서로 다른 입장은 나름 그 타당성이 양립할 수도 있으나, 팩트를 놓고 정반대로 엇갈린 정부와 의료계 양측의 주장은 그럴 수 없다. 한쪽은 틀린 말을 하고 있다는 얘기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이 7일 의사 집단행동 대응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이날 복지부는 증원 근거와 관련해 여러 회의록 존재 여부에 대해 또 말을 바꿨다. 연합뉴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이 7일 의사 집단행동 대응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이날 복지부는 증원 근거와 관련해 여러 회의록 존재 여부에 대해 또 말을 바꿨다. 연합뉴스

상식적으로 대통령이, 그것도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생방송 담화에서 여러 차례 반복하며 강조한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고 믿기는 어렵다. 그래서 지난달 30일 의대 교수와 전공의·의대생 등이 낸 의대 증원 집행정지 항고심 심문에서 서울고법이 정부 측에 "10일까지 증원 규모 2000명의 근거 등의 자료를 내면 그다음 주 (가처분 인용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했을 때 사법부의 지나친 정책 간섭이 아닌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대통령이 워낙 자신 있게 "근거가 있고 논의도 충분했다"고 했기에 법원이 가처분을 인용해 의대 증원 자체에 제동이 걸릴 일은 없을 거라 여겼다.

그런데 이젠 모르겠다. 증원과 관련해 대통령이 언급한 4개 회의를 주관한 복지부와 교육부가 동시에 회의록이 있느니 없느니, 회의록 작성이 의무니 아니니 하는 본질과 벗어난 발언을 수시로 번복하면서 2000명 증원 근거에 대한 신뢰를 정부 스스로 갉아먹고 있는 탓이다. 이러다간 "2000명이라는 숫자는 정부 내 논의 과정 없이 대통령실 내 일부 강경파 주도로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내려보낸 것"이라는 항간의 소문이 사실로 판명 날지 모를 일이다. 이는 비단 의료개혁뿐만 아니라 정부 정책 전반에 대한 신뢰 저하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가처분 결과를 지금 장담하긴 어렵다. 다만 결정과 무관하게 정부의 자료 제출 시한에 앞서 오늘(9일) 열리는 대통령 기자회견에서 단순히 "근거가 있고 논의를 했다"는 기존 언급을 넘어 누가 어떤 보고를 했으며 이후 불거진 논란에 대해 어떤 사실 확인 절차를 거쳤는지 명확하게 답했으면 좋겠다. 가뜩이나 이런저런 비선 논란에 시끄러운데, 이런 주요 정책까지 그런 쓸데없는 논란에 휘말릴까 걱정돼서 하는 말이다.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