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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영화제란? 물음 던진 지원 삭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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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나원정 기자 중앙일보 기자
나원정 문화부 기자

나원정 문화부 기자

스크린 속 승려의 발걸음은 극도로 느렸다. 하도 느려 승려 역할 배우 몸에 모기가 앉았는데, 연기를 그만둘 수 없어 고스란히 물렸다. 『서유기』의 삼장법사가 불경을 얻기 위해 자신만의 보폭을 지켰던 데서 영감을 얻어 만든 대만 영화 ‘행자’ 연작의 일화다.

2013년, 상업적 영화산업에 실험 정신을 구속받느니 자유롭게 만들어 미술관에 걸겠노라 선언했던 거장 차이밍량 감독. 10여년간 만든 연작으로 올해 전주영화제에 초청돼 전편 매진으로 화제에 올랐다. 4일 전주에서 진행한 ‘행자’처럼 걷기 콘테스트(사진)엔 200여명 영화학도, 영화애호가, 시민들이 낯선 거장의 실험에 제각기 보폭으로 공감했다. 실험·대안 영화 기치를 25년째 지켜온 전주영화제가 선물한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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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영화진흥위원회의 예산 편성을 보면 이런 영화제의 미덕이 계속될 수 있을지 불안해진다. 지원 예산이 반쪽 삭감됐을뿐더러, 지원 영화제 수도 10곳으로 제한되며 예년의 25%로 쪼그라들었다. 올해 주요 심사 잣대는 차세대 한국영화 상영·발굴 및 창작·육성. 영화제들은 혼란에 빠졌다. 영화제가 지금껏 발굴해온 신진 창작자는 각 지역 독립영화에서 나왔다. 이 지역영화 예산을 올해 전면 삭감한 정부가 상영은 많이 해야 한다는 기준을 들이댄 것이 자가당착이란 얘기다. 또 현행 심사 잣대는 국제 교류라는 측면도 간과했다는 지적이다. 시장에선 만날 수 없는 느슨한 영화적 연대와 소통이란 미덕을 지켜온 영화제들도 눈앞의 효용을 따지는 잣대에서 탈락했다.

올해 영진위는 심사 총평에서 스스로 “충분한 이유가 설명되지 않은 채 지원 규모가 축소돼 안타깝다”고 밝혔다. 좋은 영화제란 무엇인가. 반쪽 지원예산 탓에 미스터리가 돼버린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