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날 놀이공원 가고 싶어요"…가족 돌보는 혜빈이의 소원

중앙일보

입력

지난 2일 인천에 거주하는 '가족돌봄아동' 구혜빈(12) 양이 오른팔에 보호대를 두르고도 오빠의 저녁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계란을 풀고 있다. 혜빈 양은 아픈 엄마를 대신해 지적장애가 있는 오빠의 식사를 챙긴다. 이보람 기자

지난 2일 인천에 거주하는 '가족돌봄아동' 구혜빈(12) 양이 오른팔에 보호대를 두르고도 오빠의 저녁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계란을 풀고 있다. 혜빈 양은 아픈 엄마를 대신해 지적장애가 있는 오빠의 식사를 챙긴다. 이보람 기자

2일 오후 7시, 인천에 사는 구혜빈(11) 양은 능숙하게 앞치마를 둘렀다. 얼마 전 넘어져 보호대를 찬 오른손 대신 왼손으로 냉장고에서 계란 두 알을 꺼냈다. 가스 불을 켜고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른 다음 뚝딱 계란을 부쳤다. 그릇에 담은 계란부침 위엔 하트 모양으로 케첩도 뿌렸다. 가스 밸브를 잠그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지적장애가 있는 두살 터울 오빠의 끼니를 챙기는 혜빈 양의 일상적인 저녁 풍경이다. 혜빈 양은 “계란부침이 제일 자신 있다. 엄마가 안 아플 때 해주던 걸 옆에서 보고 배웠다”고 씩씩하게 말했다.

혜빈 양은 오빠와 사이좋게 저녁을 먹으면서 또래 여느 아이들처럼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재잘거렸다. “친구가 ‘X자 줄넘기’ 못 한다고 놀려서 속상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내 검지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가며 “쉿”이라고 했다. “속상했단 말 하면 엄마가 걱정할까 봐서요.” 혜빈 양은 아픈 엄마에게 걱정거리를 안겨줄까 봐 최근 팔을 다친 사실도 말하지 않고 있다가 통증이 심해지고 나서야 병원에 갔다고 한다.

혜빈 양의 일상은 매일 아침 오빠를 깨워 학교에 보내는 것으로 시작된다. 오후 2시 40분쯤 학교가 끝나면 인근 지역아동센터에서 기초 수학과 영어 등을 공부하고 5시쯤 집으로 돌아온다. 빨래를 개거나 청소를 하면 어느새 저녁을 준비할 시간이다.

혜빈 양이 팔에 보호대를 하고도 빨래를 개고 있다. 이보람 기자

혜빈 양이 팔에 보호대를 하고도 빨래를 개고 있다. 이보람 기자

혜빈 양이 이렇게 가족을 살뜰히 돌보는 건 모친의 건강이 좋지 않아서다. 모친 김혜란(38) 씨는 혜빈 양이 초등학교 1학년이던 2020년 무렵부터 신부전증, 당뇨, 고혈압 등을 앓으며 건강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지난달 8일엔 아들을 돌보기 위해 집에 방문한 장애인 활동보조사의 도움으로 119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실려 가던 도중 정신을 잃었다. 그 길로 중환자실에 입원한 김씨는 열흘 동안 병원 신세를 졌다. 김씨는 “수일 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토하기를 반복해 장염인 줄 알고 버틴 건데 병원에 가보니 췌장염이 심각해 췌장이 다 녹아내렸다고 한다. 하루 이틀만 늦었어도 죽었을 거라고 하더라”라며 “남은 평생 췌장 기능을 대신할 약을 먹으며 살아야 한다”고 했다.

김씨 입장에선 생계를 위한 경제활동은 언감생심이다. 1년에도 몇 번씩 입·퇴원을 반복하는 데다 남편의 상습적인 가정폭력으로 우울증과 대인기피증까지 생겼기 때문이다. 매달 10만원인 약값도 부담이다. 끼니는 주로 일주일에 한 번 인근 복지관에서 주는 반찬으로 때운다. 혜빈 남매의 부친이자 김씨의 남편은 김씨를 폭행한 혐의로 현재 교도소 복역 중이다. 건강상태가 나쁘지 않을 때면 식사 준비를 하지만, 몸져 누워 일어나지 못할 때가 많아 혜빈양이 물과 약까지 챙길 때가 적지 않다.

가수가 꿈이라는 혜빈 양은 아픈 엄마를 대신해 가족들을 챙기면서도 “틈날 때마다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고 했다. 혜빈 양의 애창곡은 10㎝의 ‘폰서트’다. 유튜브를 켜 반주와 함께 가사가 나오는 영상을 켠 뒤 리모컨을 마이크 삼아 노래를 불렀다. 여자아이들의 ‘아픈 건 딱 질색이니까’ 노래에 맞춰선 안무까지 완벽하게 소화했다. 흥이 많은 혜빈 양은 한참 노래를 부르고 나서야 마이크(?)를 내려놨다. 이후 오빠와 어린이날 계획을 한참 이야기하던 혜빈 양은 “어린이날 엄마와 손 잡고 놀이동산에 가는 게 소원”이라고 말했다.

혜빈 양처럼 가족 내 성인 및 아동에게 돌봄을 제공하고 있는 18세 미만 아이들은 가족돌봄아동·청소년으로 불린다. 관련 실태조사는 지난해 처음 발표됐다. 보건복지부가 지난해 4월 공개한 ‘2022 가족돌봄청년(13~34세 대상) 실태조사’ 결과 이들은 일반 청년보다 삶의 만족도가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삶에 불만족한다’는 응답이 22.2%로 일반 청년(10%)의 2배 이상이었고 우울감 유병률은 약 61.5%로 일반 청년(8.5%)보다 7배 이상 높았다.

정근영 디자이너

정근영 디자이너

혜빈양 같은 13세 미만(초등학생 이하) 가족돌봄아동에 대해선 정부 통계조차 없다. 다만 2022년 초록우산재단 자체 조사에 따르면 지원대상 아동·청소년 1494명 중 46%(686명)가 가족돌봄아동·청소년이었고 그중 23%(157명)이 초등학생이었다. 돌봄 부담 완화를 위해 ‘어떠한 지원도 받은 적 없다’는 답변은 43.1%(296명)에 달했다. 가족돌봄아동들은 심리정서(54.1%), 진로진학(36.9%), 또래 관계(24.8%), 학업(22.9%) 등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답변했다. 김승현 초록우산재단 본부장은 “심리상담이나 가사 서비스를 비롯해 세대 유형 등에 맞춘 세밀한 지원 방안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