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송길영의 빅 데이터, 세상을 읽다

본의 아니게 일찍 왔습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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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송길영 Mind Miner

송길영 Mind Miner

커피 드시나요?

우리네 삶 속 마시는 행위를 나누어 관찰해본 후, 아침에는 ‘각성의 커피’, 점심에는 ‘위안의 커피’, 오후에는 ‘해우소의 커피’를 즐기고 있음을 이야기한 지도 벌써 10년이 다 되어갑니다. 그 이후에도 커피는 꾸준히 우리 곁에서 더 많은 이들의 일상 속으로 다가왔습니다.

저 역시 업무의 동반자는 커피였습니다. 정해진 마감을 위해 집중해서 글을 쓸 때도, 도반들과 토론을 위해 희뿌연 머리를 깨워야 할 때도, 지친 일정 속 강연을 위해 힘을 낼 때도 커피는 빠른 효과를 약속하는 든든한 페이스 메이커로 제 곁을 지켰습니다. 그러던 제게 얼마 전부터 데이터 속에서나 보이던 일이 다가왔습니다. 커피를 마시면 잠이 통 오지 않아 ‘하루 1잔, 오후 2시 이후에는 마시지 않기로’ 했다는 인생 선배들의 글이 현실로 찾아온 것입니다.

잠이 오지 않아 일찍 간 강연
행사 주최 측은 감사와 환영
한 시간의 배려·여유만으로
우리의 삶은 따뜻해지기도

일러스트=김회룡

일러스트=김회룡

1000m 달리기 정도는 3분 53초 이내에 가볍게 주파하고 이온음료를 마신 후 곧바로 축구장으로 뛰어가던 10대의 근력처럼, 몇 잔의 커피를 마시고도 저녁이 되면 쿨쿨 잠을 자던 젊음의 몸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게 된 것입니다. 이것 말고도 비만과 불면, 잘 낫지 않는 상처와 같이 노화의 조짐은 한두 가지가 아님은 이미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짙은 안개 같은 머리에 순식간에 선명한 날카로움을 되찾아주는 확실한 효과와 이미 인이 박인 알싸한 맛까지 기대하게 만드는 매일의 리추얼을 빼앗긴 분함은 좀처럼 보상이 어려웠습니다.

어쨌든 할 수 없이 두 달여를 절제하고 살아오다 지난주 바쁜 일상 속, 갈증의 대안이 없는 곳에서 방심하고 마신 두 잔의 커피 효과는 대단했습니다. 야외의 행사를 온종일 마치고 돌아와 녹초가 되어 자정 즈음에 쓰러졌지만, 새벽 3시가 되자 거대한 알람 소리를 들은 것처럼 잠을 깨고 만 것입니다. 오랜만에 흡수한 카페인은 엄청난 각성 효과로 휘몰아치며, 피곤하지만 결코 잠을 잘 수 없는 가사 상태의 기상을 선사했습니다.

깨어 있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멍한 머리로 뒤척이다 별달리 대안도 없어 예정된 아침 강연을 위해 새벽에 집을 나섰습니다. 그리고 강연의 시작 시각보다 1시간도 한참 전에 도착했습니다. 너무 일찍 도착했다는 사실 마저 건물을 들어설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을 만큼, 오랜만에 카페인으로 흠씬 두들겨 맞은 저의 뇌는 아무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다음 반전은 강연의 준비를 위해 이른 새벽에 먼저 나와 계신 주최 측 분들이 큰 환영의 함박웃음으로 감사의 표현을 몇 번이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통상 바쁜 일정의 강연자들이 시간에 딱 맞추어 도착하는 것이 다반사인 데다가, 혹 아침 교통 체증으로 늦을까 노심초사하던 담당자분에게 이렇듯 일찍 오는 인사는 배려가 넘치는 사람으로 보인 것입니다.

이왕 일찍 간 김에 이것저것, 두루두루 사는 이야기를 하며 서로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잠이 안 와서 일찍 왔다는 정직한 저의 표현마저 겸손하고 소탈한 성품으로 오해하시는 그분들의 모습을 보며 지나간 저의 행동이 부끄러워짐을 느꼈습니다. 서로 불필요한 시간 낭비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정시에 맞추어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생각했었기 때문입니다. 이왕이면 조금이라도 먼저 가서 불안함을 없애 드리는 편이 좋았으리라는 것을 이제서야 알게 된 것입니다.

깨달음은 실천으로 옮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침 그날 오후에 예정된 행사에도 1시간 넘게 일찍 도착했습니다. 오전의 깨달음도 한몫을 했지만, 그 전이라면 점심 후 카페에서 시간을 맞췄을 터이나 새벽의 곤경으로 다시 커피를 끊을 수밖에 없게 된 저에게 별달리 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것도 주요한 이유였습니다. 이곳에서도 역시 지난 강연자들보다 훨씬 일찍 왔다는 칭찬을 몇번이나 받으며 저의 오전의 깨달음은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오후에 도착한 곳은 지역에 본사를 둔 금융기관의 서울 사무소로, 다른 고장의 인재들이 낯선 큰 도시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 전주에 그 고장에 다녀왔기에, 그분들의 고향에 대해 더욱 흥미로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제 책도 읽고 오셔서 사인도 해 드리고 사진도 함께 찍으며 찰나의 만남이지만 따뜻한 정을 나누었습니다.

큰 도시에서 많은 사람을 지나치다 잠시 만나 함께 하는 것은 그저 스치는 인연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단순히 기능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나누는 행운의 조우는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채워줄 수 있음을, 그리고 그 시작은 한 시간도 안 되는 작은 여유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음을 배웠습니다.

커피를 마시지 않고도 일상 속 예쁜 즐거움을 발견하며, 카페인 없는 새로운 각성을 경험합니다. 오랜 친구였지만 이제는 가까이하기 어려운 커피에게서 여유라는 뜻밖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송길영 Mind Min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