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아이 이상, 만인 전쟁터 경성을 '낯선 말'로 묘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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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7호 16면

[근대 문화의 기록장 ‘종로 모던’] 한국 현대시 문 활짝 연 시인

시인 이상이 세 살부터 20여 년간 머물렀던 ‘이상의 집’(서울 종로구 통인동 154- 10번지)을 김민호 작가가 그린 일러스트.

시인 이상이 세 살부터 20여 년간 머물렀던 ‘이상의 집’(서울 종로구 통인동 154- 10번지)을 김민호 작가가 그린 일러스트.

우리 문단에서 ‘현대시’의 문호를 활짝 열어젖혔던 이상의 시는 3음보와 4음보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한국시의 전통적 호흡 단위를 무시하고 쓰였다. 그의 시는 한국시의 형태를 ‘노래’에서 ‘읽는 시’ ‘보는 시’로 확장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아울러 기호나 수식, 그림 등을 이용한 타이포그래피 형태를 취하기도 함으로써, 시의 형식을 노래에서 ‘문자’로, 더 나아가 ‘그림’으로 확장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국시에서 이러한 정도의 과격한 형태 전환 사례는 드물다. 이 형태적 과격성이 그를 한국시의 전위(avant garde)로 계속 남게 하는 요소다. 이상에 의해 한국시는 시의 언어가 반드시 글월 문자 ‘문(文)’일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숫자와 기하학적 이미지에 대한 그의 집착은 그가 현대의 핵심적 언어를 수학으로 이해했다는 사실을 뜻한다. 그에 앞서 최남선이나 이광수와 같은 신문물의 선전자들이 있었지만 경성고등공업전문학교(서울공대의 전신)를 졸업한 이상은 그야말로 한국 작가로는 최초로 수학과 과학, 기술시대의 언어로 훈련을 받아 세상에 불려 나온 사람이었다.

그의 시에는 삼각형과 역삼각형, 사각형을 부부나 연인의 모습으로 환치하고(‘신경질적으로 비만한 삼각형 선에 관한 각서7’), ‘1 2 3 4 5 6 7 8 9 0’을 “질환의 구명과 시적인 정서의 기각처”(‘선에 관한 각서 5’)라고 한 표현이 있다. 그는 기호와 숫자가 일반적 문자보다 더 효율적이고 명확하게 삶의 양상과 세계를 형상화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에게 수학적 기호는 전통적인 ‘시적인 정서’ 표현의 대체물이었다.

식민지 근대 풍경의 강력한 표상

이상이 활동하던 시절 사진. [중앙포토]

이상이 활동하던 시절 사진. [중앙포토]

문제는 이러한 ‘낯선 말’이 지닌 역사적 함의다. 이상의 문학과 그의 생애 자체가 한 작가적 개인의 문학적 실험을 넘어 한국의 식민지 근대 풍경에 관한 강력한 표상을 이룬다.

이상은 1910년 경성부 북부 순화방 반정동(현 종로구 사직동)에서 태어났다. 1910년이라면 경술국치가 있었던 해이니, 그의 육체는 식민지의 탄생과 더불어 세상에 나온 셈이다. 현재 문화유산국민신탁이 운영하는 ‘이상의 집’이 있는 곳, 종로구 통인동 154번지가 그가 자란 백부의 집이다. 그는 누상동(현 옥인동)의 신명학교와 동광학교를 거쳐 혜화동에 있던 경성고등공업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조선의 왕이 살던 경복궁 바로 옆에서 태어나고 자라면서 학교를 다닌 그의 동선은 경희궁·창덕궁·창경궁 등 조선의 주요 궁 주변과 겹친다.

그는 20대에 친구들과 종로 어디쯤에 제비다방이라는 카페를 내기도 했다. 그는 일제의 대륙 침략기지 역할을 했던 식민지 경성, 그 중에서도 조선총독부 주변에서 나고 자랐다. 식민지 경성, 그 중에서도 종로의 아이였던 셈이다. 그의 유명한 소설 ‘날개’에서 잠에 취해 있던 주인공이 탈출을 감행한 곳은 최초의 거대 자동동력기계 기지였던 경성역과 최초의 백화점이었던 미츠코시 백화점 옥상이었다. 서른 살도 살지 못했던 그의 짧은 생애 동선이 ‘전통적 시간과의 과격하며 폭력적인 단절’의 표징이었던 경성 사대문 안에 국한되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세계사에서 그 누구보다도 철저하고 과격하게, ‘도시인’ 체험을 강제당했던 사람 중 하나였다. 현대시의 창시자였던, 그래서 세계문화사에서 현대성의 선구자로 불리는 19세기 보들레르가 세계 최초의 계획적 현대도시였던 파리의 아이였던 것과 그의 체험은 비슷하면서도 아주 다르다. 19세기 파리는 ‘세계의 수도’였으나, 20세기 초 경성은 ‘제국 수도의 모조품’이었다. 미츠코시 백화점은 동경 미츠코시 백화점의 모조품이었으며 조지야·미나카이·하라다 등의 백화점이 경성의 일본인 거주지 지역을 중심으로 세워졌다. 경성역은 도쿄역을 모델로 한 짝퉁이었다. 서구 제국주의를 동경했던 일본 사회에 불어 닥친 세계박람회와 동물원 열풍은 식민지였던 조선으로 옮겨왔고, 그 방식은 식민지 왕의 집이자 정치적 상징터였던 궁을 부수고 해체하여 노예적 굴종을 정치적으로 상징화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창경궁이 그렇게 창경원이 되었으며, 경복궁에서 그렇게 조선물산공진회(1915년)와 조선박람회(1929년)가 열렸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이식된 식민지 ‘모던’이 당시 조선인들에게 큰 저항 없이, 오히려 폭발적인 호응 속에 자리 잡아 갔다는 사실이다. 1915년 경복궁에서 열린 ‘시정 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는 조선총독부 통치 5주년을 기념하는 식민권력의 선전 행사였다. 이미 많은 부분이 훼손되기 시작했던 경복궁의 근정전 앞 홍화문과 영제교가 이 때문에 헐리는 등 대한제국 황실의 상징물이 해체되었지만, 공진회는 보란 듯이 엄청난 흥행을 이뤘다. 공진회 관람객은 116만여 명이었고 경성에서만 19만 명 가까이 관람했다. 당시 경성 인구를 감안하면 웬만한 어른은 다 가서 보는 행사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모던 경성의 시각문화와 관중』, 한국미술연구소)

1929년 조선박람회는 이보다 더 큰 규모로 진행되었다. 창경원의 야행 놀이는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구경꾼들로 매년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이는 창경원이 창경궁으로 복원되기 전 1980년대까지도 그대로 이어졌다. 여기저기 생긴 경성의 극장들, 조선 자본까지 합세하였던  백화점들 역시 만원이었다.

‘아해’가 진짜 무서워했던 대상은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한 시 ‘오감도’. [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한 시 ‘오감도’. [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상의 ‘낯선 시’로 널리 알려진 ‘오감도-시제일호’는 ‘아해’(아이)를 주인공으로 삼은 최초의 한국 현대시다. 이 시는 도로를 질주하는 아이들의 반복된 ‘공포’만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구조를 하고 있다. 설왕설래가 많은 난해시의 대표작이지만, 이 시가 이상이 태어나고 자랐던 동네를 중심으로 만들어졌던 그 새로운 ‘도로’, 도시 풍경 위에서 펼쳐지는 시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내용 역시 의외로 명확하다. 아이들은 무섭다(무서워한다)! 무서움의 대상이 무엇인지 뚜렷하지는 않으나, 시인이 보았던 풍경은 그의 동네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경성의 도시화, 근대화 과정이었다. 그는 태어난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전통의 시간을 부수고 해체하여 그 위에 ‘질주하는 도시의 속도’를 건설하는 과정 속에 거주했다. 여기에서 지적할 것은 아이들의 두려움이 이 새로운 도시의 속도 풍경에만 있지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이 시에서 아이들에게 느껴지는 가장 내밀한 감각선은 폭력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선 어떤 ‘경악’이다. 나는 아이들의 이 경악을 일제가 지은 근대 풍경의 폭력성을 넘어서, 이 위장된 모던 도시 풍경 속에 도취되고 열광하는 조선인들의 반응을 보며 느끼는 경악으로 읽는다.

이상은 수학과 근대기술로 훈련받은 사람이었고, 시골의 풍경에서 즉시 ‘권태’를 느낄 만큼 예민한 ‘모던 보이’였으나, 식민지 도시가 보여주는 이 망각의 풍경을 체질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는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한편의 저항시도 쓰지 않았고 많은 시를 일본어로 썼지만, 3·1 독립선언문을 썼던 최남선과 최초의 근대 한글 장편소설을 썼던 이광수조차도 친일을 하던 시대에 단 한 편의 친일작품도 남기지 않았다. 그는 과학과 도시, 성(性)과 병이라는 모티프를 현대시의 주제로 포섭한 한국 최초의 시인이었고, 현대문학이란 이에 관한 도시적 통찰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식민지 모던 경성을 긍정의 관점에서 수용할 수 없었다. 그의 시와 소설에서 경성은 거대한 매춘굴이었으며, 서로가 서로를 두려워하는 만인전쟁터였고, 폐병을 앓는 병든 터전이었다.

전통적 시들이 전통 사회지배 체제에 대한 근본적 질문 없이 인간의 내면과 사회 및 우주의 질서를 하나의 일관된 음악적 질서로 부드럽게 연결할 수 있다고 보았지만, 그의 몸은 지배 이데올로기와 동화될 수 없었기에 그의 언어 역시 각박하고 신경증적일 수밖에 없었다. 두려운 아이의 몸을 체화한 시적 언어, 그것이 음악이 사라진 ‘낯선 말’의 이상이 지은 현대문학이었다.

종로구청·종로문화재단·중앙SUNDAY 공동기획

함돈균 문학평론가·경희사이버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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