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중앙] 한비야 "구호는 나의 삶…여행 전문가 한비야 잊어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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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호(救護)활동 25년 차, ‘바람의 딸’ 한비야

“지금도 1억여 명 난민이 우리의 구호 손길 기다려”
“인류애, 휴전선 넘어 북녘 동포들에게도 전달됐으면” 

4월 4일 월간중앙과 만난 한비야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는 ‘해외 생활이 힘들지 않은가’란 질문에 “정적(靜的)인 바람이 있는가”라며 웃어 보였다.

4월 4일 월간중앙과 만난 한비야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는 ‘해외 생활이 힘들지 않은가’란 질문에 “정적(靜的)인 바람이 있는가”라며 웃어 보였다.

"바람의 딸.” 한비야(66)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 하면 이름처럼 따라붙는 말이다. 여기서 방점을 찍어야 할 단어는 ‘바람’에 있다. 장벽이 없는 바람처럼 국경을 넘어 자유롭게 활보한다는 뉘앙스가 배어 있다. 한국에 배낭 여행의 열풍을 몰고 온 한 교수에게 딱 걸맞은 단어이기도 하다. 어느덧 60대 중반에 접어든 그는 여전히 바람의 삶을 살고 있다. 국내에 체류하는 날은 1년에 길어야 7개월밖에 안 된다. ‘해외 생활이 힘들지 않은가’란 질문에 “정적(靜的)인 바람이 있는가”라는 유쾌한 답변이 돌아왔다. 국내에 머물고 있던 4월 어느날 , 한 교수를 만나 그간 삶에 대해 물었다.

최근에는 어디를 다녀왔나?

“작년 11월에는 르완다에 다녀왔다. 얼마 전에는 남수단에서 두 달 동안 근무했다. 올해는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 로힝야 난민촌도 방문한다. 난민촌에는 몇 백만 명이 거주하고 있다. 도움의 손길이 절실한 지역이다.”

여행이 아니라 구호(救護)를 위해 해외로 향한다는 말인가?

“그렇다. 아직도 ‘바람의 딸’ 이미지 때문에 해외로 간다고 하면 ‘한비야가 또 여행 간다’고 생각한다. 물론, 매년 2~3달 정도 배낭여행을 가지만 구호 현장에도 반드시 간다. 구호 활동을 시작한 지는 올해로 벌써 25년 차다.” (한 교수는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바퀴 반〉이라는 기행문으로 유명하다. 현재는 세계여행과 더불어 구호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나를 혼내던 구호 총괄이 지금 내 남편”

구호 현장을 찾는 이유가 무엇인가?

“구호 현장에 가면 피가 끓는다. 가슴이 뛴다. 내 능력의 최대치가 발휘되는 곳이 구호 현장이다. 정적(靜的)인 상태로 국내에 앉아 있으면 힘들다.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런 점에서 여전히 ‘바람의 딸’이다(웃음).”

학창 시절부터 남 돕는 걸 좋아했나?

“좋아했다. 정확히는 ‘티 나게’ 돕는 걸 좋아했다. 가령 친구가 다리를 다치면 하교길에 신주머니 정도는 들어줬다. 대신 그 친구를 업고 화장실에는 못 가는 성격이다.”

오히려 화장실에 동행하는 게 ‘티 나는 도움’ 아닌가?

“대신 힘들다. 힘들면 오래 할 수 없다. 구호 현장에 나와 보니 뼈저리게 느낀다. 자신의 역량껏 남을 도와야 한다. 할 수 있는 만큼만 돕는 게 모두를 위한 거다. 구호 활동처럼 복잡하고 고도의 훈련을 받은 이들이 수행해야 하는 분야는 더욱 그렇다.”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

“긴급 구호가 하는 일은 크게 3가지다. 생명을 구하고, 고통을 경감시키고, 하루빨리 일상으로 돌아가게 돕는 거다. 간단해 보이지만 고도의 훈련을 받아야만 수행 가능하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응급실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응급실에는 의사와 간호사 등 의료진만 들어갈 수 있다. 보호자가 들어가면 되레 환자에게 해가 될 수 있다.”

구호 현장에는 한 사람이라도 더 가서 도움을 줘야 하는 것 아닌가?

“구호에 대한 흔한 오해 중 하나다. 이와 관련해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 지난 2002년 아프가니스탄에 파견됐다. 당시 생사를 오가는 어린 아이들이 눈에 밟혔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한 명이라도 빨리 구하자’는 심정으로 탈레반 잔당과 동조자들이 있는 산골마을로 달려가 상부에서 허락받은 이상의 구호 활동을 하려고 했다. 이후 구호 총괄로부터 호되게 혼났다. 당시 구호 총괄은 “네가 죽으면 안 된다. 산 사람을 본국으로 보내는 게 훨씬 저렴하다”는 막말을 퍼부었다. 당시 구호 총괄이 지금 내 남편이다. 물론 지금은 내가 보스다(웃음).”

2002년 아프가니스탄이 유독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맞다. 2002년 아프가니스탄이 오늘날 한비야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중 한 아이가 유독 기억에 남는다. 간호사가 영양죽을 먹여도 숨을 헐떡이는 아이였다. 솔직히 곧 삶을 마감할 것 같았다. 그런 아이가 어느 날 내 손가락을 꽉 물더라. 따끔했다. 죽어가는 눈빛 속 빛을 봤다. ‘꼭 살아날 거예요’라고 말하는 것 같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전쟁 직후의 구호현장을 방문하는 게 두렵지는 않은가. 당시 아프가니스탄은 현지인도 하루하루 위험 속에 살아가던 시절 아닌가.

“두렵다. 안 무서웠다면 거짓말이다. 과거 이라크 전쟁 직후 이라크 모술시(市)에 갔을 때의 기억이 선명하다. 치안이 불안한 탓에 미군의 동행 없이는 이동하지 못했다. 차로 이동할 때도 미군의 보호를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앞에 가던 미군 차량 한 대가 유탄을 맞아 전복됐다. 당장 눈앞에서 차량이 유탄을 맞아 전복되는 모습을 본 것이다. 당시의 충격은 여전히 남아 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인 이들 돕고파”

구호의 손길을 기다리는 로힝야 난민 모습. / 사진:로이터

구호의 손길을 기다리는 로힝야 난민 모습. / 사진:로이터

오늘날 구호를 업으로 하는 소방관은 극심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기도 한다. 트라우마는 따로 없는가?

“있다. 특히 사상자가 많은 현장에 가면 트라우마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개인적으로는 냄새 트라우마가 있다. 과거 인도양 쓰나미 직후 인도네시아에 급파된 적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이다. 해변가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큰 피해를 봤다. 하루아침에 20만명이 목숨을 잃은 참사였다. 도착하자마자 일가 친척들이 모두 사망한 경우가 많아 미처 수습하지 못한 시신을 수천 구 봤다. 지금도 특정 냄새를 맡으면 어김없이 악몽을 꾼다. 병원에 갔지만 이미 오래전에 생긴 트라우마여서 치료하기 어렵다는 답이 돌아왔다. 평생 짊어져야 할 트라우마다.”

현장 복귀 직후 병원을 찾지 않은 이유는?

“현장에 다녀온 직후 병원에 갔으면 크게 비판 받았을 거다. 당장 ‘한가하게 심리치료나 받는다’는 비판 말이다.”

몇몇 NGO는 활동비 내역을 투명하게 공개 안 한다는 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곤 한다.

“예나 지금이나 NGO를 둘러싼 비판은 거세다. 후원자 입장에선 자신의 후원금이 어디에 쓰였는지 보고받을 권리가 있다. 다만 구호 현장에 가는 이들도 심리 치료와 최소한의 월급 등은 받으면서 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나도 욕 많이 먹었다. 그럼에도 구호 활동은 멈출 수 없다. 지난 2002년 아프가니스탄에서 만난 아이처럼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이들을 살릴 수만 있다면 욕먹어도 괜찮다.”

30년째 전 세계를 다녔다. 바람처럼 북한을 다녀오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

“아마 긴급 구호 현장에 몸담고 있다면 한 번쯤 북한 구호 활동에 대한 욕심이 있을 거다. 실제로 약 20년 전 북한을 방문한 적이 있다. 씨감자 사업 차원에서 방북했다. 당시는 민간 교류의 경우 제한적으로 방북이 허용됐다. 아직도 희망을 잃지 않고 있다.”

오늘날 북한 구호 활동은 사실상 불가능하지 않은가?

“만 65세 이후에는 이중국적을 취득할 수 있다. 남편이 네덜란드 사람이라 한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고도 네덜란드 국적자가 될 수 있다. 훗날 북한 구호현장을 다녀오고 싶다. 바람처럼 말이다. 기약 없는 꿈이지만, 또 모른다. ‘바람의 딸’이 될 거라고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언젠가는 인류애가 휴전선 넘어 북한에도 도달할 것으로 확신한다.”

“인생 후반기? ‘내돈내구’ 할 것”

한비야 교수는 “인생 후반기에 ‘내돈내구(내 돈으로 내 구호)’를 이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한비야 교수는 “인생 후반기에 ‘내돈내구(내 돈으로 내 구호)’를 이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인생 후반기를 어떻게 그려나갈지 궁금하다.

“‘내돈내구(내 돈으로 내 구호)’를 할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영원히 구호활동가(Humanitarian Assistant Practitioner)로 남을 것이다. 인류애를 갖고 다른 사람을 돕되, 내 돈으로 한다는 말이다.”

지금처럼 NGO 소속으로 구호 활동을 이어나가는 게 편하지 않나?

“NGO에 소속되는 순간 연합군이 된다. 성향상 난 독립군이 맞는다. 자유로이 활보해야 한다. 물론 NGO에 소속돼 있어야 활동 반경이 넓어진다. 동시에 NGO에 소속되면 서류 처리 등 해야 할 일이 많이 생긴다는 점에서 피곤하다(웃음). 당연하지만 후원금을 받으면 어디에 활용했는지 일일이 보고해야 한다. 재작년부터 오지 여행하면서 ‘내돈내구’, 즉 내 돈으로 구호 활동을 시작했다. 교복이 없어 학교에 못가는 아이들, 치료비가 없어 고통받는 이들이 눈에 띄면 도울 수 있는 만큼 돕고 있다.”

남편도 ‘내돈내구’에 동의했나?

“동의했다. 남편은 40년간 구호 활동을 한 베테랑이다. 나보다 15년 구호 선배다. 우리 부부에게 구호는 삶이고 생활이다. NGO에 있을 때처럼 대규모로 구호 활동을 펼치지는 못하겠지만, 소소하더라도 우리가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을 최선을 다해 도울 예정이다. 독립군 인생을 살 생각에 벌써 설렌다.”

구호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지난해 유엔난민기구(UNHCR) 발표에 따르면 1억840만 명이 난민이다. 1억 명 이상이 공포에 떨면서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다. 아파트에 거주하는 우리도 옆집에서 누가 소리치면 달려가지 않는가. 난민도 ‘지구집’에 함께 사는 가족이다. 우리가 가족에게 관심을 갖고 무엇을 도울 수 있는가 살펴보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 글 김태욱 월간중앙 기자 kim.taewook@joongang.co.kr / 사진 최영재 기자 choi.yeongja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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