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주정완의 시선

청년을 위한 국민연금은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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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주정완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주정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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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란 제목의 미국 영화가 있다. 같은 제목의 소설을 영화로 만들어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2008년)에서 작품상 등 4관왕에 올랐다. 2024년 대한민국에선 이렇게 바꾸고 싶다. ‘청년을 위한 국민연금은 없다’는 말이다. 지난 22일 국회 연금개혁특위 공론화위원회의 발표를 보면서 든 생각이다. 이날 시민대표단의 다수안으로 발표한 내용에선 청년 세대에 대한 배려가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아서다.

특히 태어난 지 얼마 안 됐거나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미래 세대에는 핵폭탄급 충격이라고 할 수 있다. 천하람 국회의원 당선인(개혁신당)이 “미래 세대 등골을 부러뜨리는 ‘세대 이기주의 개악’”이라고 비판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22대 국회에서 흔치 않은 30대 당선인인 그는 “미래 세대에 더 큰 폭탄과 절망을 안겨야 하느냐. 이러다가 미래 세대 자체가 없어질지 모른다”라고 토로했다.

공론화위 다수안, 개혁 아닌 개악
17년 전 연금개혁 노무현도 배신
미래 세대의 등골 빼먹기 멈춰야

공론화위원회의 다수안이 왜 문제인가. 청년 세대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는커녕 오히려 무거운 짐을 떠넘기는 독소 조항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큰 문제는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을 현재 40%에서 50%로 인상하는 내용이다. 듣기 좋은 말로 ‘더 내고 더 받기’라고 했지만 겉포장에 속으면 안 된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도대체 소득대체율 40%는 언제 어떻게 정해진 것일까. 원래 이 비율은 70%였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1998년 12월 이 비율을 60%로 낮췄다. 당시 국회에서 여야 합의로 법안을 통과시켰다. 외환위기의 충격이 역설적으로 연금개혁의 원동력이 됐다.

그래도 연금 재정의 구조적 적자는 심각했다. 이번엔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나섰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7년 7월 국회를 통과한 국민연금법 개정안이 그 결과물이다. 여기엔 소득대체율을 단계적으로 40%까지 낮춘다는 내용을 담았다. 물론 노 전 대통령 혼자 다 했다고 할 순 없다. 그래도 노 전 대통령의 개혁 의지와 추진력이 아니었다면 절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을 맡았던 유시민 작가는 이런 회고(『한국 대통령 통치 구술 사료집 5: 노무현 대통령』)를 남겼다. 그는 “법안을 만들어 여당(열린우리당)에 주기 전에 먼저 야당(한나라당)하고 협상한 걸 대통령이 일일이 다 보고받았고, 그래서 백지 위임장을 받고 협상해 나갔다”고 말했다. 물밑 협상에서 법안 통과의 대가로 야당이 요구하는 것에 대해선 “(노 대통령이) 뭐든지 다 해주겠다고 했다. 뭐든지 다”라며 “(협상이) 막힐 때마다 전 과정에 대통령이 개입했다”고 전했다.

이런 과정에서 성사된 게 2007년 2월 9일 당시 노 대통령과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의 여야 영수회담이었다. 유 전 장관은 “(노 대통령은) 영수회담이란 말 자체를 봉건적이라 그래서 싫어하셨는데 ‘그래도 여야 영수회담을 해줘야 됩니다. 그쪽에서 원하기 때문에’라고 말씀드렸다”고 회고했다. 이날 영수회담에선 공동 발표문까지 채택했다. 여기엔 “국민연금 재정의 건전성을 높이고 사각지대를 줄이는 방향의 국민연금 제도 개혁”이란 내용이 들어갔다.

이걸로 끝난 게 아니었다. 그해 4월 국회 본회의에 국민연금법 개정안이 올라갔지만 야당 의원들의 주도로 부결됐다. 당시 임채정 국회의장은 부결을 우려하면서 법안 상정을 망설였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직접 임 의장에게 전화해 “정부가 책임질 테니 표결에 부쳐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법안 부결의 여파로 유 장관은 사퇴하고 한덕수 총리가 야당과의 협상에 나섰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겨우 여야 합의에 이른 게 현재의 소득대체율 40%다. 인제 와서 재원 대책도 없이 소득대체율을 50%로 올리는 건 미래 세대에 죄를 짓는 것일 뿐 아니라 이른바 ‘노무현 정신’도 배신하는 것이다.

미래가 암울할 때는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나라도 국민연금을 도입해야 한다는 논의가 나왔던 1980년대 얘기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참모의 보고를 받고 이렇게 질색을 했다고 한다. “국민연금이라니, 나라 말아먹자는 얘기 아니오. 국민연금 하다가는 우리도 영국처럼 망해요.” 과도한 연금 적자로 ‘유럽의 병자’ 소리를 듣던 영국처럼 되면 안 된다는 뜻이었다.

물론 2020년대 대한민국은 1980년대 영국과는 상황이 다르다. 하지만 연금 재정의 부실이 쌓이고 쌓이면 결국 나라가 거덜 날 수밖에 없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정치적 성향이나 진영을 떠나 연금 적자 때문에 나라가 망하는 걸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부디 그렇게 되지 않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