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지영의 문화난장

가창력 논란에 자기 복제…본질 놓친 하이브의 위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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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지영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지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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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는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방탄소년단(BTS)을 낳은 K팝 최대 기획사 하이브가 흔들리고 있다.

하이브 산하 쏘스뮤직의 5인조 걸그룹 르세라핌은 최근 미국 최대 음악 축제 ‘코첼라 밸리 뮤직 앤드 아트 페스티벌’에서 망신을 당했다. 지난 13일과 20일 각각 40여 분씩 단독 공연을 펼쳤는데, 음정 불안과 음 이탈 등 가창력 논란이 불거진 것이다. 지난 2022년 데뷔한 르세라핌은 ‘K팝 그룹 중 데뷔 후 최단 기간 코첼라 입성’ 기록으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첫 공연 후 코첼라 공식 인스타그램 등 관련 SNS에는 “노래가 아니라 샤우팅” “소속사는 보컬 연습 안 시키나” 등의 혹평이 세계 각 나라의 언어로 이어졌다. 이를 의식해서인지 두 번째 공연에선 AR(미리 녹음된 음원) 소리를 과도하게 키워 마치 립싱크 같았다는 조롱까지 받았다.

르세라핌, 코첼라서 음이탈 망신
아일릿은 ‘뉴진스 베끼기’ 잡음
그래미상 후보에 한국 가수 없어
실력과 진정성 등 본질 돌아봐야

‘짭진스’ 논란 낳은 안일한 생존 전략

르세라핌이 미국 코첼라 일정을 마치고 22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하고 있다. [뉴스1]

르세라핌이 미국 코첼라 일정을 마치고 22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하고 있다. [뉴스1]

이들이 검정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귀국한 지난 22일, 더 큰 뉴스가 하이브의 위기 상황을 알렸다. 하이브가 민희진 어도어 대표에 대해 ‘경영권 탈취 시도’를 이유로 감사에 들어간 것이다. 민 대표 측은 이를 부인하고, 이번 사태를 ‘아일릿의 뉴진스 베끼기’ 의혹 제기를 한 데 따른 하이브의 언론 플레이라고 주장했다. 아일릿의 소속사 빌리프랩과 뉴진스 소속사 어도어는 모두 하이브 산하 레이블이다.

경영권 탈취 시도의 진위 여부와 별도로 여론은 민 대표의 ‘자의식 과잉’을 비난하는 쪽으로 흐른다. 자신이 세상에 없던 콘셉트로 뉴진스를 만들어낸 양 ‘민희진풍’ 운운한 데 대한 반감이다.

하지만 지난달 데뷔한 아일릿을 보고 “뉴진스인 줄 알았다”는 반응이 나왔던 것도 사실이다. 긴 생머리의 청순한 다섯 소녀. ‘짭진스’란 비아냥이 근거없진 않았다. 유행을 만들고 따라가는 게 대중문화의 속성이라지만, 하이브란 같은 회사 안에서 이렇게 비슷한 걸그룹이 재생산됐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성공 공식의 자기 복제라는 가장 근시안적이고 안일한 생존 전략을 펼쳤기 때문이다. 스스로 수명을 단축하는 자충수다.

K팝의 위기는 하이브 방시혁 의장이 공론화시킨 화두다. 지난해 관훈포럼과 tvN 예능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연이어 등장해 K팝 시장의 위기를 거론했다.

그의 경고대로 위기의 징후는 곳곳에서 감지됐다. 올 2월 열린 그래미상 시상식은 K팝 가수 후보가 한 명도 없는 상태로 치러졌다. 지난해까지 3년 연속 후보에 올랐던 BTS의 공백이 실감 났다. 지난해 11월 빌보드 뮤직 어워드에선 신설된 4개의 K팝 부문에서만 수상자가 나왔다.

충성도 높은 ‘헤비 팬덤’에 의존해 성장한 K팝 시장의 기형적 현상도 돌출됐다. 걸그룹 에스파 카리나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지난 2월 카리나의 연애 사실이 알려진 뒤 팬들의 비난이 빗발쳤고, 결국 카리나가 자필 사과문을 올리고 연인과 결별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헤비 팬덤’ 충성도 의존해 K팝 성장

24일 서울 용산구 하이브 본사 앞에 뉴진스 팬들이 보낸 시위 트럭이 서 있다. [뉴스1]

24일 서울 용산구 하이브 본사 앞에 뉴진스 팬들이 보낸 시위 트럭이 서 있다. [뉴스1]

음원 스트리밍 시대에 앨범 판매 비중이 너무 높은 것도 불안한 요소다. 지난해 K팝 음반 판매량은 1억장을 돌파하며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앨범 판매량으로 줄 세우기를 해 팬덤 간 경쟁심을 자극한 결과다. 앨범에 포토 카드를 무작위로 끼워 넣어 다량 구매를 유도하는 마케팅 기법은 지난해 공정거래위원회의 조사도 받았다.

K팝 산업의 지속가능성을 위해선 가벼운 마음으로 음악을 즐기는 ‘라이트 팬덤’의 확장이 필수다. ‘내 새끼 지상주의’가 아닌 팬들에겐 기본 자질을 못 갖춘 가수는 관심거리가 못 된다.

본질에 충실해야 한다는 답 역시 방시혁 의장 스스로 이야기한 바 있다. 그는 2년 전 서울대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으며 “당장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본질에 집중해야 한다고 스스로 진단과 처방을 내렸던 것이 지금까지 회사를 살아남게 한 결정적 이유”라고 했다. 데뷔 당시 대형 기획사 소속이 아니란 이유로 ‘흙수저 아이돌’로 불렸던 BTS는 실력과 진정성으로 세계 정상에 올랐다.

지난 10여 년간 K팝은 한류의 선봉에 서 있었다. 지난해 파행 위기의 잼버리에 구원투수로 등장했듯, 국가경쟁력에도 영향을 미친다. 노래 못하는 가수, 베껴 만든 그룹으론 오래 못 갈 위상이다. 하이브와 어도어는 각각 법무법인을 선임해 법적 공방을 준비하고 있다. K팝 톱 기업의 진흙탕 내분을 지켜보게 된 상황이 더욱 답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