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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안혜리의 인생

잘나가는 성형외과 의사 "죽으려 했다"…그런 그에게 온 축복 셋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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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지난 15일 수술을 막 마치고 나온 홍준표 박사를 서울아산병원 그의 연구실에서 만났다. 그의 다양한 관심사를 보여주듯 다양한 소품이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장진영 기자

지난 15일 수술을 막 마치고 나온 홍준표 박사를 서울아산병원 그의 연구실에서 만났다. 그의 다양한 관심사를 보여주듯 다양한 소품이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장진영 기자

홍준표(56) 서울아산병원 명예교수는 잘 나가는 성형외과 의사다. 미용 목적이 아니라 질병·사고 환자를 보는 재건 분야 성형외과 전문의 사이에선 한국을 넘어 북미·유럽·아프리카·중동에서도 그를 모르면 "간첩" 소리를 듣는다. 평생 업적을 토대로 주로 70대 이상에게 주는 미국성형학회의 말리니악 상(Maliniac Lectureship)을 50대 초반(2020년)에 받았을 정도로 권위 있는 주요 상도 휩쓸었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무조건 절단했던 당뇨발(당뇨병성 족부궤양) 재건을 보편화해 보존율(91%)은 물론 환자 5년 생존율(86%)을 드라마틱하게 올린 공로 등을 인정받아서였다. 최근엔 머리카락보다 가는 0.3mm 림프관을 혈관과 잇는 초미세수술인 림프부종 수술 등 여러 혁신적 수술을 개척하고 있다. 이런 초미세수술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전 세계적으로도 열 손가락 안에 꼽는다고 한다.

세계 최고 성형외과 전문의
과거 명예만 좇던 이기주의자
좌절·추락 후에 나를 내려놔
가자에서 의사 된 초심 찾아

그런 그가 올 4월부터 정규 교수직을 스스로 내려놓고, 서울아산병원 최초로 연 12주만 근무하는 파트타임 근무 계약을 맺었다. 앞서 가자 지구로 의료봉사를 다녀오기도 했다. 그는 왜 안주 대신 새 일을 자꾸 벌일까. 지난 15일 서울아산병원에서 만나 4시간여 동안 들은 그의 인생 이야기를 재구성한다. 안혜리 논설위원

프롤로그 : 반전 또 반전, 그게 인생 

올 초 뜻밖의 대중적 인지도를 얻었다. 프랑스의 국제 의료 구호단체인 '국경없는의사회 한국 지부' 홍보 영상을 통해서다. 안식년이었던 지난해 이 단체 소속으로 가자 지구에서 5주 동안 봉사한 후 올 초 공개된 이 인터뷰 영상은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 이어 이스라엘-이란 무력 충돌 등 중동 지역 긴장이 고조되면서 3개월 만에 529만 뷰를 기록했다. 영상에 '활동가'라는 타이틀로 등장하기에 적잖은 사람들이 전문 구호 봉사자로 오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니다. 수술·연구를 병행하는 성형외과 전문의다. 다만 밥벌이를 넘어 다른 기여할 방법을 찾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오로지 나밖에 몰랐던 지독한 이기주의자가 나를 내려놓고 다른 이를 도우려 노력하기까지, 여기엔 반전을 거듭한 삶의 변곡점이 있었다.

인생의 첫 번째 반전 : 좌절, 원주 

의사로서의 특별한 사명? 그런 건 없었다. 어쩌다 보니 의대(연세대)에 갔다. 원래 정신과에 관심이 있었는데, 실습해보곤 소질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흉부외과에 잠시 전율을 느낀 적도 있지만 4주 실습만으로도 죽을 거 같았다. 그래서 안다. 그걸 택한 의사들이 얼마나 '또라이'처럼 그 일을 사랑하는지.

안혜리의 인생

몸으로 때우는 걸 좋아하고 성격도 급하니 내과보단 외과, 특히 결과가 바로 보이는 성형외과가 딱이었다. 인턴 마치자마자 모교인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지원하려 했는데 교수님이 "군 제대 후 하라"기에 순순히 따랐다. 그런데 마감 전날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서류 빼. 원주(세브란스 분교) 가. " 아무 연고 없는 강원도 원주에 가면서 맹랑한 맹세를 했다. '나더러 돌아오라고 빌 만큼 후회하게 만들겠다. '

욕하면서 갔는데 결과적으로 원주가 내 인생 최고의 반전이 됐다. 당시 서울과 원주를 잇는 영동고속도로는 편도 1차선이라 교통사고가 많았다. 환자에 비해 교수는 모자라 다른 병원 전공의들보다 몇 년을 앞질러 혼자 집도까지 할 정도로 외과 의사로서 정말 많은 경험을 했다.

전공의 1년 차 때인 1997년, 일주일 휴가 빼곤 집에 간 게 5일이 채 안 됐다. 2년 차를 비롯해 성형외과 의국 선배들이 죄다 한 번씩 도망갔다 오는 바람에 1년 차 땐 독박을 쓰다시피 했다. 그런데도 도망가지 않았는데, 응급실과 성형외과 병동 간호사들 도움이 컸다. "무조건 해결할 테니 새벽 2~5시엔 호출을 안 해줬으면 좋겠다"고 부탁했고, 그렇게 매일 수면 시간 3시간을 확보한 덕분에 그 많은 수술을 감당할 수 있었다.

훌륭한 의사와 훌륭하지 않은 의사의 차이는 결국 경험, 하나다. 그걸 원 없이 했고, 그래서 행복했고, 마음이 편하니 몸이 괴로운 건 참을 수 있었다.

원주 세브란스병원 전공의 2년차 때 인생의 은사인 정윤규 교수님(맨 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 전공의들, 간호사들과 함께한 홍준표 박사(맨 뒷줄 왼쪽에서 첫 번째). [사진 홍준표]

원주 세브란스병원 전공의 2년차 때 인생의 은사인 정윤규 교수님(맨 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 전공의들, 간호사들과 함께한 홍준표 박사(맨 뒷줄 왼쪽에서 첫 번째). [사진 홍준표]

원주가 준 축복이 하나 더 있다. 인생 최고의 스승으로 꼽는 정윤규 교수님과의 만남이다. 그는 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 현실판 같은 의사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환자 생각, 그러니까 털끝만 한 희망이라도 보인다면 포기하지 않고 시도할 수 있는 수술은 무조건 했다. 이분에게 미세수술을 배웠고, 무엇보다 환자를 대하는 이런 '태도'를 배웠다. 나에게 "전공의 수련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난 이렇게 답한다. "인생의 태도를 바꾸는 것이다. "

원주 아니었으면 지금의 나는 없다. 좌절의 원주, 실은 축복이었다.

인생의 두 번째 반전 : 추락, 에티오피아 

외교관 출신 아버지 덕분에 '영어'라는 자산을 물려받아 큰 도움을 받았다. 전공의 4년 차 시절인 2000년 세계 최고 미세수술센터가 있는 대만 장궁병원(長庚病院)에서 한 방문 레지던트도 그랬다. 3개월 체류 동안 영어 논문까지 썼고, 단기연수로 와있던 당시 고경석 교수 권유로 서울아산병원에 올 수 있었다.

지난 17일 서울아산병원 성형외과 의국에서 오스트리아, 멕시코, 스페인, 포르투갈, 싱가포르, 독일, 터키, 말레이지아, 영국 등 세계 전역에서 온 전공의들과 함께. [사진 홍준표 페이스북 캡처]

지난 17일 서울아산병원 성형외과 의국에서 오스트리아, 멕시코, 스페인, 포르투갈, 싱가포르, 독일, 터키, 말레이지아, 영국 등 세계 전역에서 온 전공의들과 함께. [사진 홍준표 페이스북 캡처]

나는 혜택을 누렸지만 세계적 실력의 국내 인재들이 영어 장벽 탓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게 안타까웠다. 그래서 지난 2010년 서울아산병원 성형외과장이 되자마자 아침 미팅, 저널 리뷰 등 과 공식 언어를 영어로 바꿨다. 서울아산병원에는 전 세계에서 온 1년짜리 펠로(전임의·6명 정원)와 외국인 방문 레지던트가 매년 120명에 달하는데, 국내 의료진 모두 영어 소통에 아무 문제가 없을뿐더러 더이상 저평가 받지도 않는다.

이런 개혁을 비롯해 젊은 나이에 기획조정실장보(2008) 등 병원 행정가로서도 주목받다 보니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돈다고 착각했다. 오로지 나의 출세, 나의 명예. 그러다 2014년 나를 추락시킨 '그 사건'이 터졌다. 상대와의 약속에 따라 구체적 언급은 못 하지만 술자리에서의 불미스런 일로 그땐 자살까지 생각했다. 매일 2시간씩 달려야 탈진해 겨우 잠들 수 있었다. 그때 친한 형이 이렇게 물었다. "최악이 뭔데?" 극한에 몰리면 사고가 멈춘다. 그저 만사가 무섭다. 이 말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비단 그 사건뿐만 아니라 지금까지의 인생을 돌아보고 반성했다. 나만 잘났다는 허영에 취해 스스로 멈추지 못하니 하늘이 시련을 줬구나, 싶었다. 그때까지 숱한 해외 의료봉사와 개도국 전공의 수련을 담당했는데,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걸 하기보다 내 영광을 펼치려는 이기적 동기가 컸다는 걸 깨달았다.

인생의 가장 큰 좌절을 느끼던 10여년 전, 봉사 가서 만난 에티오피아 전공의 아브제 브루하누(Abeje Brhanu) 생각이 자꾸 나서 자비로 한국에 불러 교육을 시켰다. 지난해는 1년짜리 펠로로 서울아산병원에 왔다. [사진 홍준표]

인생의 가장 큰 좌절을 느끼던 10여년 전, 봉사 가서 만난 에티오피아 전공의 아브제 브루하누(Abeje Brhanu) 생각이 자꾸 나서 자비로 한국에 불러 교육을 시켰다. 지난해는 1년짜리 펠로로 서울아산병원에 왔다. [사진 홍준표]

홀린 듯 그 사건 직전 에티오피아 봉사에서 만난 아브제 브루하누가 자꾸 생각나, 자비로 한국에 불러 6개월 동안 전공의 연수를 시켰다. 전에는 시혜 베풀듯 수술해주고 왔지만 이를 계기로 현지 의료인 교육을 통해 그들이 직접 자기 국민을 돌볼 수 있는 봉사로 바꿨다. 여러 지역에서 이런 봉사를 하고 있지만 에티오피아는 더 각별하다. 코로나 전까지 매년 갔고, 지금은 아디스아바바 세인트 폴 대학 외래교수 자격으로 에티오피아 재건센터 건립 자문을 하고 있다. 부끄러움을 알게 된 덕분에 함께 성장하는 여정 속에서 희열을 맛보게 됐다.

추락의 순간, 알고 보니 인생 두 번째 축복이었다.

인생의 세 번째 반전 : 역설적 희망, 가자 지구 

지난 20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7~8년 전 한국에서 수련했던 우크라이나 전공의들이 SNS를 통해 도와달라고 요청해왔고, 그해 4월 폴란드 국경 크라쿠프로 날아갔다. 제자들이 국경 병원으로 환자를 데려오면 팀을 이뤄 수술했다.

이때 뭔가가 나를 뒤흔들었나 보다. 강의와 수술 시연을 원하는 세계 각국 병원이 워낙 많다는 핑계(실제로 2023년 한 해 동안 20개국을 갔다)로 2022년 말 안식년을 냈지만, 하고 싶은 건 따로 있었다. 국경없는의사회 가입이었다. 그다음 해 5~6월 5주 동안 가자 지구 파견이 결정됐다. 이땐 하마스의 이스라엘 침공(10월) 전이었는데도 무서웠다. 사전 교육을 하면서 '사망 시 보험금 수혜자 지정'서류를 작성하고 '납치 시 암호 7가지' 등의 서류에 사인하는 것만으로도 닥칠 일이 실감 났다.

홍준표 박사가 지난해 봉사갔던 가자지구 내 최대 의료 시설인 알시파 병원. 하마스 침공 이후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지금은 이렇게 폐허로 변했다. [AFP=연합뉴스]

홍준표 박사가 지난해 봉사갔던 가자지구 내 최대 의료 시설인 알시파 병원. 하마스 침공 이후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지금은 이렇게 폐허로 변했다. [AFP=연합뉴스]

우여곡절 끝에 이스라엘 텔아비브 공항 검문을 넘어, 팔레스타인 국경 검문소에서 몇백 미터를 지나 또 하마스 검문을 거쳐 가자 지구 최대 병원인 알시파 병원에 갔다. 전쟁 발발 뒤 이스라엘이 "하마스 비밀 군사시설"이라며 공습해 지금은 폐허가 된 바로 그 병원이다. 첫 근무 전날 밤 현지 스텝들과 야외 루프탑 식당에 갔는데 "쾅" 소리의 폭발음과 함께 노란 섬광이 번득였다. 폭발보다, 그 와중에 태연히 밥을 먹는 동료들 모습에 더 놀랐다. 전쟁의 일상화를 이렇게 목격했다.

하마스의 이스라엘 침공 전인 지난해 5월 홍준표 박사는 국경없는의사회 소속으로 가자지구 알시파 병원, 나자르 병원 등에서 다리 재건 수술을 집도했다. [사진 홍준표]

하마스의 이스라엘 침공 전인 지난해 5월 홍준표 박사는 국경없는의사회 소속으로 가자지구 알시파 병원, 나자르 병원 등에서 다리 재건 수술을 집도했다. [사진 홍준표]

폭발이 많다 보니 화상 환자 천지였다. 처음 요구받은 것도 화상 치료였다. 화상 환자 본 지 15년이 넘었고, 현지 의료진은 경험이 많아 수준이 높았다. 다리 재건 전문인 내가 기여할 게 없다 싶었다. 그런데 알시파 병원 과장이 갑자기 "네가 그 JP 홍?"이라며 알아봤다. 그리곤 다리 재건 환자를 수없이 데려왔다. 가자 국경에서 지난 2018년 3월부터 1년여 벌어진 팔레스타인 시위(Great March) 당시 이스라엘군이 쏜 고무총에 맞은 사람들이었다. 제대로 치료를 못 받은 채로 4~5년을 지낸 환자들인데, 20년 전 수준의 병원 인프라를 활용해 열심히 수술을 가르쳤다. 엉망인 기구와 고장 난 기계, 뒤떨어진 현지 의술 등 모든 게 부족한데도 환자들은 불만은커녕 늘 "감사하다""나를 포기하지 말아 달라"고 웃었다. 그 참혹한 현장에서 역설적으로 왜 의사가 됐는지 깨우치게 됐고, 애써 웃는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목숨을 내놓으며 봉사하는 동료 의사를 통해 희망과 인류애를 봤다. 나를 내려놨기에 경험할 수 있었던 축복이었다.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