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승에서 2승까지 20년 걸렸다…서울대 야구부 “패배에서 인생을 배웠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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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9월 1일 동대문구장에서 송원대를 2-0으로 꺾고 1977년 창단 이래 첫 번째 공식경기 승리를 맛봤던 서울대 야구부(위). 이후 20년 동안 다시 가시밭길을 걷다가 지난 19일 강원도 횡성베이스볼테마파크에서 경민대를 9-2로 물리치며 다시 승리의 감격을 나눴다. 사진 대한야구협회, 서울대 야구부

2004년 9월 1일 동대문구장에서 송원대를 2-0으로 꺾고 1977년 창단 이래 첫 번째 공식경기 승리를 맛봤던 서울대 야구부(위). 이후 20년 동안 다시 가시밭길을 걷다가 지난 19일 강원도 횡성베이스볼테마파크에서 경민대를 9-2로 물리치며 다시 승리의 감격을 나눴다. 사진 대한야구협회, 서울대 야구부

경기종료를 알리는 마지막 아웃카운트가 선언되자 선수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그라운드로 달려 나와 기쁨을 만끽했다. 전국대회 우승도, 라이벌전 승리도 아니었지만, 이들에겐 한국시리즈 우승보다도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대학야구의 ‘백전백패 최약체’ 서울대가 애타게 기다린 공식경기 승리의 환희를 맛봤다. 2004년 역사적인 첫 번째 승리 이후 무려 20년이 걸린 2승째다.

서울대는 지난 19일 강원도 횡성베이스볼테마파크에서 열린 한국대학야구연맹(KUBF) U-리그 B조 경기에서 경민대를 9-2로 물리쳤다. 6회말까지 9-1로 크게 앞섰고, 경민대가 7회 공격에서 1점만 뽑으면서 콜드게임 승리가 선언됐다.

1977년 창단한 서울대는 다른 학교와 달리 엘리트 선수가 많지 않아 대학야구에선 만년 약체로 불렸다. 밥 먹듯이 콜드게임 패배를 당했고, 실력 차이가 워낙 커 심심찮게 퇴출설도 불거졌다. 창단 이래 27년간 치른 공식경기 성적은 무려 1무199패. 그러나 일반 학생들의 의지를 앞세워 명맥을 이어왔고, 마침내 2004년 9월 1일 지금은 사라진 동대문구장에서 열린 전국대학야구 추계리그 예선에서 송원대를 2-0으로 물리쳐 공식경기 승리를 맛봤다. 당시 탁정근 감독의 지도 아래 체육교육과 4학년이자 ROTC 장교 후보생이었던 박진수가 완봉승을 거두면서 드라마를 완성했다.

서울대 야구부를 이끄는 정석 감독. 사진 정석

서울대 야구부를 이끄는 정석 감독. 사진 정석

서울대는 그러나 다음 20년 동안 다시 가시밭길을 걸었다. 체육교육과를 비롯해 일반 학과를 전공하는 학생들이 계속 주축을 이루면서 엘리트 선수 위주인 다른 학교를 상대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 2010년부터는 프로야구 OB 베어스와 LG 트윈스 등에서 사령탑을 역임한 이광환 감독이 지휘봉을 잡았지만, 공식경기 승리는 늘 남의 이야기였다.

이처럼 20년간 고전하던 서울대는 최근 들어 전력이 달라졌다는 평가를 들었다. 고교야구 엘리트 무대에서 활약하던 선수들이 함께 입학하면서다. 덕수고 내야수 이서준이 2022학년도 수시모집을 통해 체육교육과로 들어왔고, 뒤이어 정시모집에서 합격한 신일고 왼손 투수 박건우가 정시모집에서 합격하면서 이서준과 같은 체육교육과 22학번 신입생이 됐다.

앞서 덕수고 외야수 겸 투수 출신인 13학번 이정호와 서울고에서 외야수로 뛴 17학번 홍승우가 차례로 야구부에서 활약하기는 했지만, 엘리트 선수 두 명이 함께 입부한 사례는 이때가 처음이다. 최근 모교에서 대학원 과정을 마친 이정호는 코치로 이번 20년 만의 승리를 돕기도 했다.

서울대 야구부가 19일 강원도 횡성베이스볼테마파크에서 경민대를 9-2로 물리치고 20년 만의 공식경기 승리 기쁨을 맛봤다. 콜드게임 승리를 알리는 전광판. 사진 서울대 야구부

서울대 야구부가 19일 강원도 횡성베이스볼테마파크에서 경민대를 9-2로 물리치고 20년 만의 공식경기 승리 기쁨을 맛봤다. 콜드게임 승리를 알리는 전광판. 사진 서울대 야구부

이날 경민대를 상대로 2회 1점을 먼저 내준 서울대는 곧바로 이어진 2회 공격에서 정승원의 우전 적시타를 시작으로 대거 4점을 뽑은 뒤 3회에도 4점을 추가해 승기를 잡았다. 이어 6회 1점을 더했고, 7회 수비를 1실점으로 막아 9-2 콜드게임 승리를 가져갔다. 이서준은 2번 유격수로 나와 3타수 1안타 2타점으로 활약했고, 3회부터는 마운드로 올라 3이닝 2피안타 1볼넷 3탈삼진 무실점 호투해 승리투수도 됐다.

다음날 연락이 닿은 서울대 정석 감독은 “정말 감개무량하다. 이틀 전 한국골프대와 3-3으로 비기면서 잘하면 승리를 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빨리 기쁨이 찾아올 줄 몰랐다”면서 “경기가 끝나자마자 선수들끼리 얼싸 안으며 감격을 나눴다. 상대를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세리머니를 한 뒤 옆 구장으로 넘어가 승리를 자축했다”고 웃었다.

오른손 투수 출신으로 성남고와 동국대를 나온 ‘1973년생 92학번’ 정 감독은 대학교 졸업 후 바로 국군체육부대(상무)에서 군 복무를 마친 뒤 미국으로 건너갔다. 자신의 잠재력을 알아본 LA 다저스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하고 꿈을 키웠다. 그러나 불의의 사고와 이로 인한 부진이 겹치면서 2000년 현역 유니폼을 벗었고, 이후 북일고와 연세대, 서울고 등에서 투수 인스트럭터를 지내며 지도자의 길을 걸었다. 2009년에는 탁정근 감독이 물러난 서울대로부터 감독대행 제안을 받아 자리를 옮겼고, 이듬해부터 새로 부임한 이광환 감독을 코치로 보좌했다.

서울대 야구부가 19일 강원도 횡성베이스볼테마파크에서 경민대를 9-2로 물리치고 20년 만의 공식경기 승리를 맛봤다. 사진은 이날 공식기록지. 사진 한국대학야구연맹

서울대 야구부가 19일 강원도 횡성베이스볼테마파크에서 경민대를 9-2로 물리치고 20년 만의 공식경기 승리를 맛봤다. 사진은 이날 공식기록지. 사진 한국대학야구연맹

2020년 정식 사령탑이 돼 지금까지 서울대를 이끌고 있는 정 감독은 “사실 우리가 엘리트 야구부를 이기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이서준과 박건우를 비롯해 어릴 적 야구를 조금이라도 경험한 친구들이 많이 들어오면서 전력이 좋아졌다”면서 “요새는 한 가정의 아이가 보통 한 명뿐이라 운동을 시키지 않는 추세다. 그래도 야구선수가 되겠다는 꿈을 잊지 않던 아이들이 공부로 서울대생이 된 뒤 야구부를 통해 그 꿈을 다시 실현시키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현재 야구부원은 모두 23명이다. 전공은 체육교육과부터 건축학과, 수학과, 경영학과, 경제학과 등 각양각색이다. 배경과 실력은 모두 달라도 선수들이 상대 전력분석을 위해 자청해서 전국을 돌아다니는 등 정말 열심히 노력했다”고 덧붙였다.

아마추어 시절까지 유망주로 불렸지만, 프로 무대에서 실패를 맛본 정 감독은 “우리 선수들은 나름 공부 엘리트 소리를 들으면서 서울대까지 온 친구들이다. 살면서 느껴보지 못한 좌절을 야구부에서의 패배로 많이 경험했을 것이다”면서 “선수들에게 ‘오늘의 좌절이 쓰라리겠지만, 인생을 살면서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해주곤 한다. 나 역시 좌절과 패배에서 인생을 배웠듯이 선수들도 야구부에서의 생활을 통해 삶의 경험을 쌓아나가길 바란다”고 했다.

경민대전 승리 후 정석 감독(위)을 헹가래하는 서울대 야구부 선수단. 사진 서울대 야구부

경민대전 승리 후 정석 감독(위)을 헹가래하는 서울대 야구부 선수단. 사진 서울대 야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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