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K' 넘어선 깐느박, 미국 자본으로 베트남의 고통을 세계에 외치다

중앙선데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886호 28면

‘동조자’로 돌아온 박찬욱 감독

인간이 가진 두 얼굴과 그 사이의 혼란에 천착하는 박찬욱 감독. 생각에 잠긴 박 감독의 모습을 다중노출 기법으로 촬영했다. 최기웅 기자

인간이 가진 두 얼굴과 그 사이의 혼란에 천착하는 박찬욱 감독. 생각에 잠긴 박 감독의 모습을 다중노출 기법으로 촬영했다. 최기웅 기자

지난 15일 박찬욱 감독의 신작 ‘동조자(The Sympathizer)’ 1화가 쿠팡플레이를 통해 공개됐다. 미국 HBO맥스 오리지널 7부작으로, 박찬욱 감독이 제작과 각본·연출까지 전 과정을 지휘했다. 앞으로 7주간 한 편씩 미국과 동시 공개되는데, 지난주 미국 현지 시사회 이후 타임지는 “대단하고 야심찬 TV시리즈. 각색을 박찬욱에게 맡긴 건 행운”이라고 평했다. 여러 의미를 내포하는 평이다.

‘동조자’는 베트남계 미국인 비엣 타인 응우옌의 퓰리처상 수상 소설 원작으로, 베트남 전쟁 때 스파이로 활동한 프랑스와 베트남 혼혈인 대위(호아 수안데)의 ‘두 얼굴의 사나이’ 스토리다. 박찬욱은 ‘올드보이’ ‘박쥐’ ‘헤어질 결심’ 등 칸 영화제 수상작들로 ‘한국 영화를 해외에 알린 사람’(뉴욕타임스)으로 통하지만, 이미 ‘K’를 훌쩍 넘어섰다. 미국이 유일하게 패전한 베트남 전쟁 소재를 미국 자본을 태운 대중적 콘텐트로 만들어 전 세계에 뿌리고 있는 게 그다.

그뿐 아니다. ‘동조자’는 박찬욱이 가장 좋아하는 스파이물인데다, 그의 필모그래피를 관통하는 정체성 혼란에 관한 이야기다. 박찬욱의 진면모를 드러낼 작품으로 기대치가 높을 수밖에 없다. 18일 시사회 직전 만난 그도 “감개무량하다”고 표현했다. “6~7년 작업해온 게 한 편씩 공개되니까요. 후반작업이 오래 걸려서 사실 아직도 일이 덜 끝났어요. 마지막 에피소드 믹싱을 내일 새벽 6시에 원격으로 해야 하죠.”

1억 달러 투입, 제작·각본·연출까지 참여

할리우드 신흥 명가 A24의 작품이지만, A24를 선택한 건 박찬욱이다. 10년 넘게 개발하고 있는 차기작 ‘액스’의 공동작가인 돈 맥켈러를 통해 친해진 캐나다 프로듀서 니브 피쉬먼이 그를 찾아 한국까지 날아온 게 시작이다. “무슨 급한 일인지 이 먼 데까지 오더니, 판권을 샀다면서 TV시리즈의 쇼러너를 맡아 달라더군요. 읽어보니 너무 재밌고 각색도 쉬울 것 같았죠. 그렇게 우리가 A24를 끌어들이고, A24가 HBO를 접촉해서 성사가 됐어요.”

원래 스파이 영화 마니아셨다죠.
“제임스 본드의 활극을 좋아했던 것과 별개로, 존 르 카레의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를 읽고 큰 충격을 받았어요. 자기 정체성이 아닌 걸 연기하며 가면을 오래 쓰다보니 자기 얼굴이 되어버리는 이야기에 빠져들었죠. ‘아가씨’ ‘박쥐’ ‘리틀드러머걸’이 다 그렇잖아요. 스파이가 특별한 세계에 있는 게 아니에요. 보통사람도 ‘나는 어떤 존재’라고 자기를 규정하기 어렵고, 순간순간 생각과 다른 행동을 할 때도 많잖아요. 나는 이런 사람이 아닌데 어쩔 수 없이 이러고 있네 싶겠지만, 그것도 나의 일부인 거죠. 보편적인 인간의 면모라 생각해요.”
베트남 전쟁을 미국 자본으로 베트남의 관점에서 그리다니요.
“베트남전을 다룬 할리우드 영화가 많지만, 아주 진보적인 감독들조차 전쟁 당사자인 베트남인을 배제했어요. 미국에도 양심적인 사람이 있다는 또 하나의 미국 예찬이고, 베트남인들의 고통은 소재로 활용됐죠. 하지만 미국인으로서의 한계일 뿐, 다른 관점을 보여주는 건 다른 사람들의 몫이라 생각해요. 다문화사회인 미국이 대중문화 산업에서 다양한 목소리를 허용하지 않았지만, 조금씩 변화하고 있어요. 그동안 듣지 못했던 목소리를 자꾸 내야 하고, ‘동조자’는 2중으로 새로운 목소리라 생각해요. 하나는 베트남 사람 목소리, 두 번째는 북베트남 사람과 남베트남 안에서 북베트남에 동조했던 사람, 즉 공산주의자들의 목소리죠. 그렇다고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사람의 주장을 설파하는 게 아니라, 이념에 대한 맹종을 비판하고 싶은 거예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똑같다는 거죠.”
한국인이 만들기 버겁지 않았나요.
“미국인이 만드는 것보단 낫죠. 동양적 마음과 서양적 마음 사이의 갈등을 다루는데 동양인이 더 적합하기도 하고요. HBO도 내가 쇼러너라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였죠. 1억달러가 훨씬 넘게 투여된 TV시리즈가 베트남어를 전면에 사용하고 많은 분량을 자막 처리한다는 게 뜻깊은 일이고, 옛날이라면 그냥 동양인 얼굴이면 됐을 걸 엄격하게 북쪽 남쪽 억양까지 구별해서 캐스팅했거든요. 베트남인 보기에 속상하지 않게 애쓴건데, 미국 대중문화산업이 변화하고 있다는 얘기죠. 한국과 무관한 이야기도 아니에요. 현대사가 똑닮아서 너무 흥미로웠고, ‘공동경비구역 JSA’와도 연결된 느낌을 받았죠. 이영애가 혼혈로 설정되어 병사들이 이질감 느끼고 비협조적인 것처럼, ‘동조자’의 대위도 베트남인들에게 계속 경멸의 대상이니까요.”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로다주)에게 1인 4역을 맡긴 이유는요.
“여러 백인 남성 캐릭터가 한자리에 모이는 씬에서 깨달았어요. 각각 교수와 영화감독, 하원의원, CIA 요원이지만 결국 하나의 존재구나. ‘사회에서 성공한 가부장적인 백인 남성’이라는 하나의 몸통에 붙은 네 개의 얼굴이라는 거죠. 그게 중요한 포인트라 생각했고, 관객이 직관적으로 알게 하고 싶었어요. 캐스팅을 정말 잘하고 싶어서 누구는 마이클 섀넌, 누구는 마크 러팔로, 누구는 조슈 브롤린, 이렇게 꿈을 꾸다 보니 각자 개성이 너무 강하잖아요. 반대로 한명에게 다 시켜야겠다 싶었죠. 로다주도 질질 끌지 않고 곧바로 수락하더군요.”

미래 관객 의식하면 해외 관객에게 통해

할리우드 스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오른쪽)가 1인 4역을 맡아 화제다. [사진 모호필름]

할리우드 스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오른쪽)가 1인 4역을 맡아 화제다. [사진 모호필름]

그는 듣던대로 좀 까칠했다. 내내 웃음기없이 빈틈없는 답변만 내놨다. 그런데 음악 얘기를 꺼내니 “알려지지 않은 70년대 펑키한 소울음악을 찾는 게 정말 재밌었다”며 소년처럼 미소짓는다. 한때 미술사학자를 꿈꿨을 만큼 미술에도 조예가 깊다. 엘그레코, 카라바지오, 고야의 “역겹고 추한 것과 아름답고 숭고한 것이 공존하는 세계”를 좋아한다는데, 그러고보니 ‘두 얼굴의 사나이’가 따로 없다. 클래식 연주회에 부인과 손잡고 나타나는 다정한 얼굴 뒤로 광기어린 잔혹한 영화를 만들고, 자신은 더없이 끔찍한 장면을 묘사하면서 남이 만든 공포영화는 무서워서 못 본단다. “벌레 공포증이 있어서 영화에 벌레를 자주 등장시킨다”길래 “편집은 어떻게 하냐”고 물으니 “가짜라는 걸 아니까”란다.

스파이에 소질이 있을 것 같은데요.
“시야가 넓고 눈치가 빠르지 않아서 현장 잠입은 안 되겠지만, 스파이 마스터는 잘할 것 같아요. 우리 요원이 우리를 배신하고 갔다고 적에게 믿게 만들려면 설득력 있게 시나리오를 설계하고 물자를 동원하고 예산을 책정하고 캐스팅까지 해야 하니까. 영화감독의 일이죠.”
영화감독이 된 계기는요.
“이두용의 ‘최후의 증인’과 김기영의 ‘화녀 82’를 보고 한국에서도 이런 영화가 만들어지는구나, 개안한 느낌이었어요. 외국영화를 보며 막연히 꿈꾸긴 했지만, 한국영화계는 건달들이 장악한 거친 세계라고 알아서 나같이 나약한 사람이 버틸 수 없을 것 같았거든요. 두 감독의 영화를 보고 겁낼 일만은 아니구나 깨달았고, 노력해보기로 한 거죠.”
부조리한 세상을 향한 분노가 영화를 만드는 원동력이라고 했었는데.
“지금은 아니죠. 지금은 나에게도 책임과 원죄, 오류가 있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해요. 물론 나 자신에 대한 분노는 있지만, 지금 원동력은 일단은 책임감이죠. 갈수록 책임이 커지고, 약속을 지켜야하는 의무가 생기니까요.”
박찬욱 영화는 그리스비극 같아요.
“내가 영향받은 요소 중 하나죠. 오래 살아남을 영화를 만들고 싶은 의도였어요. 몇십년 후 손자세대도 비웃지 않을 이야기를 찾다보니 보편적인 인간심리를 향하게 되고, 그러다보니 신화적인 세계에 가까워졌어요. 재밌는 건 해외는 꿈도 못꾸고 그저 미래 관객을 의식했을 뿐인데 본의 아니게 해외 관객에게 통하게 됐다는 거죠.”
최근 영감을 받은 ‘썸띵’이 있다면.
“통영국제음악제에서 선우예권·양인모·조인혁의 공연을 봤는데, 한국남자들도 멋있다는 영감을 받아서 좋았어요. 진은숙 예술감독의 프로그램이 참 좋더군요. 음악가들 면면도 존경스럽고요.”
‘천만영화’에 대한 로망은 없나요.
“천만이란 숫자가 중요한 건 아니죠. 그저 투자자들이 결정을 후회하지 않고, 참여한 동료들이 맥빠지지 않을 정도면 되요. ‘다른데 투자할걸’ 하지 않아야 내가 다음 작품을 할 수 있기도 하고요.”

그의 차기작은 이병헌, 손예진 캐스팅설까지 나온 ‘액스’로 알려졌지만, 동시에 여러 작품을 개발 중이란다. 한국 영화의 ‘구멍’으로 지적되는 SF도 개발중이라니, ‘박찬욱판 SF’도 궁금해진다. “워낙 SF소설을 좋아하는데, 되게 어려운 분야예요. 좋은 SF영화가 잘 없는 이유죠. ‘설국열차’를 제작한 걸로 만족할까 하다가, 일본 라이트노벨 원작인 ‘학살기관’을 개발 중이예요. 근미래 테러리즘에 대응하는 군사첩보 SF인데, 투자가 잘 돼야 볼 수 있겠죠.(웃음)”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