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김정탁의 인문지리기행

진압군 얕본 이괄, 안산의 바람 방향 바뀌자 패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6면

무악재 안산과 이괄의 난

김정탁 노장사상가

김정탁 노장사상가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할 수 있었던 건 위화도에서 회군해서다. 회군이 조선 건국에 있어 이처럼 중요한 전환점이었기에 건국의 주역들이 개국의 정당성을 아무리 미화해도 조선은 반란으로 세워진 나라임이 분명하다. 그래서인지 조선 왕조 600년 동안 반란이 여러 차례 있었다. 그중에서 두 개가 성공했는데 연산군을 폐위시킨 중종반정과 광해군을 쫓아낸 인조반정이다. 반란이 성공하면 반정(反正), 즉 바른 상태로 돌아가는 일이지만 실패하면 역적의 난이 된다. 그런데 실패한 반란 중에서 거의 성공할뻔한 게 있었는데, 인조 2년(1624)에 일어난 이괄(李适, 1587~1624)의 난이다.

인조반정 수훈 무관은 찬밥 대접
아들 역모죄 씌우자 군사 일으켜

의기양양 한양 입성 새 왕 추대도
전세 뒤집히자 민심 변덕 등돌려

임금이 충청까지 피난 초유의 일
국방력 손실 호란 패배로 이어져

휘하에 임란 때 투항 왜군까지 거느려

이괄의 반란군을 제압한 안산의 동쪽 봉우리에는 승전봉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인왕산에서 바라 본 안산의 승전봉. 인왕산과 승전봉 사이가 무악재다. [사진 김정탁]

이괄의 반란군을 제압한 안산의 동쪽 봉우리에는 승전봉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인왕산에서 바라 본 안산의 승전봉. 인왕산과 승전봉 사이가 무악재다. [사진 김정탁]

이괄은 인조반정에서 결정적인 수훈을 세웠다. 김류(金瑬)가 총대장으로 반정군을 지휘하기로 돼 있었는데 어쩐 일인지 거사 당일 약속된 시간보다 한참 후에 나타나서 이괄이 임시 총대장이 돼 반정군을 지휘했다. 그런데도 공신 책봉에서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무관 출신이라 문관들이 낮춰 봐서다. 내심 못마땅했어도 부원수 겸 평안병사 직을 부여받고는 국경 방위 임무에 충실했다. 후에 청나라를 세운 여진족이 당시 세를 크게 확장하던 터라 평안도 방면의 방위가 중요해져서다. 이 때문에 그의 휘하에는 조선 최고의 정예병과 임진왜란 때 투항한 왜군까지 있어 군세가 막강했다.

그런데 이괄이 반역을 도모한다고 누군가 고자질했다. 반정 세력이 집권에 성공했어도 정국이 불안해서 밀고를 장려한 탓이다. 의금부 도사가 평안도로 가 이괄의 아들을 역모죄로 체포하려고 하자 “아들이 역적인데 아비가 무사할 수 있느냐?”라며 도사와 선전관의 목을 베고 반란의 기치를 들었다. 그리고 1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한양으로 내달렸다. 먼저 평안도 개천을 점령하고, 평양의 장만(張晩) 군대는 피한 뒤에 황해도와 경기도를 거치면서 관군을 제압했다. 마침내 거사 20일 만에 서대문을 통해 한양에 입성했는데 인조와 조신들은 전날 피난길에 올라 입성이 쉽게 이루어졌다.

이괄이 백마를 타고 의기양양하게 입성하자 반란군과 호응했던 수천 명의 군사가 마중을 나왔다. 이괄의 기병들이 ‘도성 사람들은 놀라지 마라. 새 임금이 즉위했다’라고 앞에서 소리쳤다. 그러자 관아의 구실아치와 하인들이 몰려나와 만세를 부르면서 맞이했고, 백성들은 길을 닦고 새 황토를 깔아서 영접했다. 그리고 선조의 열 번째 아들인 흥안군(興安君)을 새 왕으로 추대하고, 조정도 새 인물로 갈아치웠다. 조정에 자리를 얻으려는 사람들로 붐벼 인선 작업은 비교적 쉽게 이루어졌다.

한강 건널 때 서로 배 타려 아우성

승전봉에서 바라본 인왕산. 멀리 북한산이 보인다. [사진 김정탁]

승전봉에서 바라본 인왕산. 멀리 북한산이 보인다. [사진 김정탁]

인조는 반란군이 임진강까지 남하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는지 강화도로 피신하려던 계획을 바꾸어서 충청도 공주산성으로 서둘러 피난길에 올랐다. 피난길이 얼마나 다급했던지 간신히 구한 배로 한강을 건널 적에 왕을 수행하던 사람들이 서로 배에 타려고 우르르 몰려들었다. 인조를 호송하던 병조 좌랑 이경석(李景奭)이 칼을 뽑아 이 혼란을 수습했다. 이경석은 훗날 병자호란(1637) 때 누구도 꺼린 삼전도 비문을 기꺼이 작성했던 소신 있는 인물이다. 인조가 배를 타고 한강 한가운데 이르니 궁궐은 이미 불타서 불꽃이 하늘로 치솟았다.

한편 진압군 책임자인 장만은 한양의 도성 백성들이 이괄의 반란군에 동조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되도록 빨리 공격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에 따라 반란군이 한양에 입성한 바로 다음 날 이들과 운명을 건 승부를 무악재의 안산에서 벌이기로 했다. 진압군이 안산에 진을 친 건 방어사 정충신(鄭忠信)이 병법에 북쪽 산을 먼저 점거하면 이긴다는 말이 있다면서 안산을 먼저 점거할 것을 주장해서다. 또 안산에 진을 치면 도성이 내려다보이므로 반란군이 덤비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반란군은 올려다보며 싸워야 하지만 진압군은 도성을 내려다보며 공격하므로 진압군 쪽이 유리해서다.

안산과 인왕산을 연결하는 다리. 다리 밑이 무악재. [사진 김정탁]

안산과 인왕산을 연결하는 다리. 다리 밑이 무악재. [사진 김정탁]

이괄은 안산을 점거한 진압군의 수가 적은 것을 보고 도성 백성들에게 ‘장만의 군대를 단숨에 무찌르겠다. 싸움을 구경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성 위에 올라가서 구경하라’라는 포고문을 곳곳에 써 붙였다. 이에 따라 도성 백성들은 아침부터 인왕산 성벽에 올라타서 싸움을 구경했는데 이 모습은 성벽 위에 백로가 앉아 있는 듯했다. 반란군은 경기감영(현 서대문 로터리 서울적십자병원 자리) 부근에서 군대를 둘로 나누어 한 부대는 경기중군영(현 동명여중 자리)에서 안산을 향해 올라갔고, 다른 한 부대는 아현을 지나 대현 쪽에서 안산으로 진격했다.

처음에는 동풍이 휘몰아쳐 싸움하기에 반란군이 유리했다. 이에 반란군이 바람을 등에 업고 기습 공격을 감행하자 진압군은 후퇴해야 했다. 그런데 바람의 방향이 갑자기 바뀌어서 동쪽에서 불던 바람이 서북풍으로 변해 반란군은 바람과 마주하며 싸워야 했다. 또 휘날리는 흙먼지로 눈을 뜰 수가 없어 시간이 흐를수록 전황이 반란군에게 불리해졌다. 이때 진압군이 총공세를 펴니까 전세가 삽시간에 역전되었다. 싸움은 진압군의 대승으로 끝났고, 싸움이 벌어진 안산 동쪽 봉우리에는 승전봉(勝戰峰)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무악재에서 바라본 서대문 풍경. 오른쪽에 서대문독립기념관(구 서대문형무소)이 있다. [사진 김정탁]

무악재에서 바라본 서대문 풍경. 오른쪽에 서대문독립기념관(구 서대문형무소)이 있다. [사진 김정탁]

반란군은 안산과 가까운 서대문을 통해 다시 성안에 들어오려고 했지만, 백성들이 서대문은 물론이고, 서소문까지 닫아버렸다. 조금 전만 해도 반란군이 이기길 내심 바랐던 백성들이었는데 어째서 태도가 이렇게 급변했을까? 반란군에게 훼방을 놓아 싸움에 지게 만들어야 했는데 구경만 했으니 처벌받을까 두려워서가 아니었겠는가. 반란군은 어쩔 수 없이 남대문을 통해 입성한 뒤 광희문으로 빠져나가 이천으로 향했다. 이괄은 가는 길에 부하들에 의해 죽임을 당해 반란은 실패로 끝났다.

그런데 이괄의 반란군이 장만의 진압군을 서둘러서 공격하지 않고 안산을 포위한 채 기다렸다면 결과가 어떠했을까? 이겼을 가능성이 크다. 반란군에 의해 보급이 차단돼 진압군이 안산에서 오래 버티기가 힘들어서다. 그러나 이괄은 자신만만했기에 진압군이 패배하는 것을 백성들 앞에서 똑똑히 보여주고 싶었다. 이에 따라 반란군은 진압군이 의도한 대로 한양에 입성한 바로 다음 날 싸움을 벌이고 말았는데 이는 너무 성급한 결정이었다. 이것이 거의 다 이룬 반란의 성공을 나락에 빠트린 결정적인 패착이 되었다.

이괄의 난은 반란군이 한양에까지 침입해 왕이 충청도로 피난 가는 사태에 이르렀기에 조선 왕조 초유의 일에 해당한다. 그러니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한양은 재건되기도 전에 또다시 심한 진통을 앓아야 했다. 또 왕의 피난으로 생긴 공백으로 한양은 무질서와 혼란에 다시 빠져들었고, 창경궁의 주요 건물인 통명전·양화당·환경전 등의 건물들도 모두 불탔다.

노련한 장수들 반란으로 잃어

그런데 이것보다 더 심각한 피해가 있었으니 그건 유능한 장수들의 죽음이다. 진압군의 핵심 무장이었던 정충신이 안산 싸움에서 승리한 뒤 탄식하며 말했다. “다행히 전투는 이겼어도 작년에는 (인조반정으로) 박엽을 죽이고 올해는 이괄을 죽였으니 북쪽 오랑캐는 누구를 시켜서 방어할 수 있을까?” 이괄과 박엽을 비롯해 한명련처럼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장수를 반란으로 잃은 건 국방력의 관점에선 뼈아픈 손실이다. 게다가 이괄의 난을 치르면서 평안도 방어 병력도 급감했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대가 한양에 빨리 입성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사태와 무관하지 않다.

실학자 이수광이 쓴 『지봉유설』에 따르면 북한산 인수봉은 어린애가 누군가 등에 업혀서 달아나는 형상이라 부아암(負兒岩)으로 불렀다. 그래서 아이가 달아나는 것을 막기 위해 안산을 어미 산, 즉 모악(母岳)이라 규정했다. 이런 모악에서 이괄의 난을 분쇄했으니 등에 업혀서 달아나는 어린애를 차단하는 데 일단 성공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난 병자호란에서 한양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으니 등에 업힌 어린애는 결국 달아난 게 아닌가. 그렇다면 반란 진압에 골몰한 나머지 나라 안보는 소홀히 한 셈이다. 지금의 정치권도 싸움에만 골몰하니까 이렇게 되지 않을까 봐 걱정이다.

김정탁 노장사상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