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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극 리어, 셰익스피어와 판소리의 만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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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오희숙 음악학자·서울대 음대 교수

오희숙 음악학자·서울대 음대 교수

‘목숨이 모두 고통이로구나. 눈보라, 눈보라. 온 세상이 무덤 같구나. 눈보라, 눈보라 속에 나는 우노라.’ 딸들에게 버림받은 리어왕은 절규한다. 그의 분노와 후회는 판소리로 쩌렁쩌렁 무대에 울려 퍼진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리어왕’이 지난 3월 29일부터 4월 7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에서 창극으로 무대에 올랐다.

‘온 세상은 무대, 모든 인간사는 연극’으로 보았던 셰익스피어(1564~1616)는 ‘한 시대를 위한 작가가 아닌 전 시대를 위한 작가’로 칭송되는 인물이다. 그의 작품들은 연극뿐 아니라 오페라. 드라마, 영화, 뮤지컬 등 다양한 장르로 구현되었는데, 이번에는 한국의 전통 창극으로 공연되었다. 오페라 ‘맥베스’와 ‘오델로’를 작곡했던 셰익스피어 예찬론자 베르디(G. Verdi)도 포기했던 ‘리어왕’이 과연 한국 전통 음악을 통해 어떤 모습으로 재탄생할까? 2년 전 초연에서 많은 호평을 받았던 이 공연이 궁금하여 작년 11월에 티켓을 예매했다. 당시 이미 거의 매진되어,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셰익스피어 비극, 한국적 재탄생
판소리·창, 내면의 감정 잘 표출
전통예술의 현대화 성공적 구현

창극 ‘리어’의 한 장면. [사진 국립극장]

창극 ‘리어’의 한 장면. [사진 국립극장]

이 공연을 기획한 국립창극단은 1962년 창단된 단체로 한국의 전통 판소리를 바탕으로 음악극 ‘창극’(唱劇)을 선보이고 있다. ‘춘향전’ 같은 전통적 주제뿐 아니라 서양의 고전을 각색하여 무대에 올리고 있는 국립창극단 유은선 예술감독은 “‘리어왕’의 원작이 창극을 전제로 만들어지기라도 했던 것처럼, 원작을 읽으며 상상되었던 장면들이 창극과 잘 어울린다”고 말한다.

여기에는 각색을 담당한 배삼식 작가의 역할이 컸다. 배삼식은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에서 ‘천지불인(天地不仁, 세상은 어질지 않다)’이라는 노자(老子)의 사상을 떠올렸고, 이를 노자의 물(水)의 철학과 연결하여 독자적인 시각에서 대본을 썼다. 이를 통해 서양식 원작은 동양적 정서를 흠뻑 담은 극으로 자연스럽게 변화되었다. 자신에 대한 사랑을 묻는 리어왕에게 딸 코딜리아는 ‘신언(信言)은 불미(不美)하고, 미언(美言)은 불신(不信)’이라는 도덕경의 글귀로 답을 하며 입을 다물고, 이복형 에드가를 모함하는 에드먼드는 ‘예(禮)도 지(智)도 신(信)도 모른다’고 자신을 방어한다. 광대는 ‘일락서산(一樂西山)에 해 떨어지고 월출동령(月出東嶺)에 달 솟는다’는 민요를 부르고, 리어왕은 찰진 한국어 욕을 구사하며 딸을 비난하고, 에드가는 ‘한푼 줍쇼’로 너스레를 떤다.

맛깔스러운 한국어 대사는 한승석의 작창(作唱)과 정재일의 작곡으로 2막 10장의 음악극이 되었다. 190분의 공연 내내 피를 토하는 듯 강렬한 판소리 독창과 웅장한 코러스가 무대를 휘어잡았다. 리어왕(김준수)의 분노와 슬픔, 글러스터(유태평양)의 비참한 심정, 딸들(이소연, 왕윤정, 민은경)의 위선과 효심, 에드거(이광복)의 바보짓, 에드워드(김수인)의 간교함 등이 우리 가락으로 거침없이 표현되어, 전통적 창이 인간의 내면 깊숙이 내재한 감정을 얼마나 잘 표출할 수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유머 코드 역할을 톡톡히 한 광대의 빠르게 말하는 창법 덕분에 비극에서 잠시 벗어나 많이 웃었다.

아쉬웠던 점은 노랫가락이 거의 단선율의 비슷한 패턴으로 진행되어 음악적으로는 다소 단조롭게 느껴진 것이다. 우리 창이 주로 단선율로 구성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선율의 굴곡을 조금 살렸으면 좋았을 것 같다. 또한 판소리의 선율은 그 자체로 음량이 크고 다이내믹이 아주 큰 편이었는데, 모두 마이크를 사용하여 판소리 고유의 독창적 음색인 거칠고 탁한 소리를 잃어버려 안타까웠다. 비극적 내용에서 느낄 수 있는 슬픔과 삶의 고독을 느낄 수 있는 여지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무대 뒤에 자리 잡은 기악 파트 역시 마이크를 사용하여 고유한 전통 악기의 매력이 잘 부각되지 않았다. 전통적 악기 외에도 바이올린과 첼로 등 서양 악기도 활용되었는데, 이 악기들과 판소리가 같이 진행되는 부분에서는 마치 뮤지컬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면서, 극의 흐름이 다소 끊기는 인상을 주었다.

그럼에도 창극 리어는 전통예술의 현대화를 성공적으로 구현한 공연이라 할 수 있다. 극과 음악 그 하나하나가 완결된 형태로 모아졌고, 각색의 중심 아이디어인 ‘물’의 컨셉트에 맞추어 20t의 물로 채워진 무대(정영두 연출, 이태섭 무대감독)는 극의 예술성을 한층 끌어 올렸다. 코러스 ‘물이여 멀고 먼 길 고단한 물이여’로 시작하여, ‘다시 흐르고 흘러 흘러가는 물’로 마무리되는 창극 리어를 감상하면서 ‘온 목숨이 고통’인 우리 삶의 비극을 생각하였고, 그래서 다시 살아보자는 용기를 받을 수 있었다.

오희숙 음악학자·서울대 음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