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주얼 마스터의 깜짝 외도…'눈부시다' 환갑 신인 가수 유은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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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데뷔한 패션 디자이너 정구호

이 사람을 설명하려면 머리가 복잡해진다. 1980년대 뉴욕에서 회사를 다니다 한식당을 차렸다. 90년대 청담동에 자기 이름을 건 부티크를 열고 패션 디자이너가 됐는데, 2000년대 영화 ‘황진이’ ‘스캔들’ 미술감독으로 유명해졌다. 대기업에 들어가 브랜딩 전문가로 활약하면서 공연 연출가로도 명성을 떨쳤다. 지난해 그가 연출한 서울시무용단 ‘일무’는 K컬처의 대표주자로 뉴욕 링컨센터에 오르기도 했다. 정체가 뭔가 싶은데, 여하튼 뭔가 세련된 포장이 필요한 분야는 장르를 가리지 않고 그를 찾는다. 삼성미술관 리움 같은 고품격 공간 디자인부터 신인가수 뮤직비디오 컨셉트까지, 전방위 비주얼 마스터로 활약해  온 정구호(62) 얘기다.

영화 미술감독·공연 연출가로도 명성

패션·공연·공간·브랜드 등 전방위 비주얼 마스터 정구호가 ‘유은호’란 예명으로 싱글 ‘눈부시다’(아래 사진)를 발매했다. [사진 임형규]

패션·공연·공간·브랜드 등 전방위 비주얼 마스터 정구호가 ‘유은호’란 예명으로 싱글 ‘눈부시다’(아래 사진)를 발매했다. [사진 임형규]

장르는 달라도 육십 평생 ‘비주얼’에 올인해 온 그가 최근 ‘보컬’ 외도를 시작했다. ‘눈부시다’라는 제목의 디지털 싱글을 내고 ‘유은호’라는 예명으로 가수 데뷔를 선언한 것이다. 미니멀리즘과 젠 스타일을 선도해 온 국내 대표적인 모더니스트가 자칭 “아재 발라드”라는 복고풍 노래를 부르니 영 낯설다. “음악에도 도파민이 만연하는 시대잖아요. 왜 예전에 듣던 음악을 하면 안되나요. 우리 또래가 즐길 노래가 너무 없어요. 나이 들어도 각자의 세대에서 공감할 수 있는 노래가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노래방 마니아였을 뿐, 딱히 가수를 꿈꾼 건 아니다. 환갑을 앞두고 버킷리스트같은 이벤트를 준비하다 주변의 권유로 일이 커졌다. 기타리스트 함춘호가 반주에 참여하고, 마스터링은 미국에서 해 올 정도로 공을 들였다. “쉬는 날엔 노래방에서 살 정도로 노래를 좋아해요. 20년 넘게 같은 노래방에 모이는 후배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눈부시다’ 작곡가예요. 음악을 공부하다 포기했던 친구죠. 3년 전 제가 50대 마지막 생일을 기념해 미니콘서트를 열려고 1년 동안 보컬 레슨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때 그 친구에게도 음악을 다시 하라고 부추겼어요. 그 바람에 용기 얻어 작곡을 시작했다며 첫곡을 저에게 준 거죠. 또 다른 친구도 가만 있을 수 없다며 제작비를 댔고요. 그래서 세 사람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서 ‘유은호’라는 예명을 만든 거예요. 몰래 하려고 했는데, 엔지니어들이 좋은 노래 많이 알리자더군요. 기왕 이렇게 된 거 잘 해보려고요. 벌써 후속곡도 준비 중입니다.”

공연 연출가로서 늘 파격을 실험하는 정구호지만, 옆집 아저씨가 부르는 듯한 그의 노래는 지금까지 보여준 실험들과는 반대 의미에서 충격적이다. “비즈니스로 남의 노래를 기획하라면 파격적인 걸 하겠지만, 이건 그냥 나 자체니까요. 일만 화려했지, 저도 집에 가면 라면 끓여먹고 소소하게 하루를 보내죠. 최백호나 정훈희, 정미조 같은 가수를 좋아하거든요. 그 나이가 낼 수 있는 느낌이 있고, 그게 멋있어 보이잖아요. 진짜 노래를 노래답게 부른달까요. 저도 마음만큼은 그분들처럼 노래에 진심입니다.(웃음)”

‘눈부시다’는 사랑노래인 동시에 정구호 자신을 가리키는 노래다. 작곡가가 그에게 선물하기 위해 작사가에게 ‘살다보면 좋은 일도 나쁜 일도 겪지만, 돌아보면 그 모든 것들이 눈부시다’는 이야기를 담아달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지나간 젊음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가이드 음원을 듣고 눈물이 핑 돌았어요. 저도 참 열심히 살았고, 이쯤되니 뒤돌아보게 되잖아요. 나이든 사람만 아는 감성이지만 너무 신파는 아니게, 행복한 분위기로 밝게 표현하고 싶었어요. 작곡가도 저를 보면서 인생을 늘 즐기며 살아가는 모습이 눈부셨다고 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었으면 좋겠는데, 없어서 아쉽다는 이야기도 되죠.(웃음)”

기타리스트 함춘호 반주 참여 화제

정구호 앨범

정구호 앨범

싱글인 그는 몇 해 전만 해도 “십수년간 연애도 못하고 바쁘게 살았다. 제대로 안할 거면 연애할 시간에 쉬는 게 낫다”고 했었는데, 사랑노래를 부르며 연애세포가 살아난 걸까. “일로 시작해서 일로 끝나던 시기도 있었죠. 나이 들어가면서 느려지고 편안해지고 보는 눈도 넓어진 것 같아요. 이제 정신적인 여유를 좀 갖고, 나이가 있어도 로맨스가 있다는 것도 얘기하고 싶네요. 사실 저 원래 ‘금사빠’에 엄청 로맨티스트거든요. 뉴욕에서 회사를 때려치고 식당을 차린 것도, 15년간 정착했던 뉴욕에서 돌아와 한국에서 패션 디자이너가 된 것도 그때마다 우연히 만난 사랑 때문이었어요. 사랑 때문에 직업을 몇 번 바꿨으니, 완전 순정남이죠. 또 다시 바꿀 수도 있어요. 지금도 그런 우연을 기다립니다.”

아직도 친구들이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냐’고 물을 정도로 여러 일에 발 담그고 있지만, 가장 좋아하는 일은 공연이다. 올해도 대표작 ‘일무’ ‘향연’ 재공연과 오페라 ‘마술피리’ 연출이 예정돼 있는데,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신의 예술성을 순수하게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래는 그러기엔 아직 실력이 모자라단다.

“저는 그냥 제 아이덴티티를 계속 찾아가는 사람이에요. 늘 새로운 일에 도전하며 내가 이런 일도 할 수 있구나 발견해 왔죠. 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니 좋은 결과를 냈고, 또 다른 방향의 기회가 열렸어요. 그래서 늘 성공에 대한 자신감이 있죠. 이번엔 제 스스로에게 ‘네가 진짜 하고 싶은 걸 해 봐’라고 제안한 셈인데, 녹음실에서 제 목소리를 딱 듣는 순간 갸웃했네요. 스스로 의심이 든 만큼 더 열심히 했고, 다음 곡은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후속곡은 1932년 나온 재즈곡 ‘뷰티풀 러브’다. 우디 앨런의 영화 ‘범죄와 비행’에도 쓰였고, 엘라 피츠제럴드, 사라 본 등 거의 모든 재즈싱어들이 불렀던 불후의 명곡 커버에 도전하는 것이다. “워낙 재즈를 좋아하기도 하고, 누구나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를 하고 싶어요. 빌 에반스의 피아노 연주로 유명한 곡인데, 가사도 너무 좋거든요. ‘아름다운 사랑은 참 미스터리하다’는 이야기죠. 아직도 소년 같다고요? 맞아요, 영원히 철들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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