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게차 어디로 몰죠? '길' 안 보이는 중소기업들…중처법 한숨 [르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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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아침 조회 시간마다 안전 교육을 실시하고, 공사에 들어가기 전에 체크리스트를 만들면서 대비하고 있어요. 20개에 가까운 서류도 구비해놓고요. 그런데도 법이 워낙 복잡하다보니 우리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불안감만 크죠.”

부산에서 철근 콘트리트 전문건설업 ‘창성공영’을 운영하는 안병호 대표는 기자에게 이렇게 토로했다. 이곳에서 일하는 직원은 7명으로, 지난 1월 27일부터 50인 미만 사업장까지 확대된 중대재해처벌법(중처법) 적용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중처법에서 요구하는 의무사항이 복잡하고 모호하다보니 어떻게 대비해야할 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안 대표는 “작은 사업장도 대기업과 같은 수준을 요구하니 막막하다”고 밝혔다.

중처법 적용 대상이 상시 근로자 5인 이상 50인 미만(공사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까지 확대되면서 전국 83만 중소 사업주들의 혼선이 커지고 있다. 정부는 지난 1월 말부터 ‘산업안전대진단’을 통해 중소 사업장을 지원하고 있지만, 실질적인 도움을 위해 실효성을 보다 높여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근영 디자이너

정근영 디자이너

28일 고용노동부와 안전보건공단에 따르면 산업안전대진단은 온라인 자가 진단을 통해 자기 사업장의 위험 수준을 빨강·노랑·초록 등 삼색 표시로 파악하고, 이후 컨설팅·기술지도·재정지원 등 정부지원을 연계받는 식으로 진행된다. 지난 25일 기준 온라인 자가 진단을 완료한 경우는 21만건, 실제 정부지원을 신청한 사업장은 9만3000개소로 파악됐다. 전체 확대적용 대상 기업(약 83만7000개소)의 10% 수준이다.

 지난 20일 경기도 시흥시에 위치한 건설기자재 제조업체 '반도스틸'에서 지게차가 기자재를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다. 나상현 기자

지난 20일 경기도 시흥시에 위치한 건설기자재 제조업체 '반도스틸'에서 지게차가 기자재를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다. 나상현 기자

지난 20일 경기 이천시의 건설기자재 중소 제조업체 ‘반도스틸’에서 진행된 안전대진단 과정을 동행 취재해보니 실제 사업장에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개선점들이 나왔다. 공장 내부에서 용접 작업 시 발생하는 아크(용접 스파크)가 튀어오르는 모습을 지켜보던 정노준 안전보건공단 기술사는 반도스틸 측에 “용적 작업을 하다보면 흄(중금속 연기)을 많이 흡입할 수 있게 되니 작업대에 국소배기장치를 설치하면 더 안전하게 작업할 수 있을 것”이라고 권고했다.

이곳 야적장엔 지게차로 바닥에 쌓인 기자재를 옮기는 작업이 한창이었는데, 지게차가 이동하는 구역과 기자재가 쌓여있는 구역에 명확한 구분이 없었다. 지게차는 실수 한 번에 근로자가 깔리거나 부딪혀 사망할 수 있는 대표적인 중대재해 요인 중 하나다. 정 기술사는 “구획선을 그려서 구분해주면 더 안전하게 작업을 할 수 있다”고 했고, 반도스틸 측도 “지게차 작업계획을 토대로 매일 교육을 하기 때문에 문제는 없지만, 안전을 위해 이르면 연내 구획선도 그릴 계획”이라고 답했다.

경기 시흥시의 스프링 제조업체 '오성스프링'에서 스프링 제품을 생산하는 기계 모습. 이우림 기자

경기 시흥시의 스프링 제조업체 '오성스프링'에서 스프링 제품을 생산하는 기계 모습. 이우림 기자

하지만 중소 사업장 일각에선 정부 지원과 홍보를 더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경기 시흥시에서 상시근로자 9명의 스프링 제조업체 ‘오성스프링’을 운영하는 조성기 대표는 지난 26일 기자와 만나 “안전대진단과 관련해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했다”며 “주변에 비슷한 다른 사장님들도 정보가 전혀 없다고 아우성”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고용부 관계자는 “38만개 사업장에 대진단 공문을 발송했고, 협·단체와 유관기관을 통해서도 안내를 하고 있다”면서도 “(적용 대상이) 워낙 많다 보니 안내를 못 받았다고 하시는 분들도 있을 수 있는데, 최대한 많이 알리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스프링 제조업체 '오성스프링'을 운영하는 조성기 대표가 해본 산업안전대진단 자가 진단 결과. 중간 단계인 노랑이 나왔다. 이우림 기자

스프링 제조업체 '오성스프링'을 운영하는 조성기 대표가 해본 산업안전대진단 자가 진단 결과. 중간 단계인 노랑이 나왔다. 이우림 기자

형식 면에서 영세한 현장 상황과 동떨어져 있다는 지적도 있었다. 이날 기자의 도움을 받아 자가 진단을 해본 조 대표는 “예를 들어 안전보건을 위한 예산을 마련해놨냐는 질문이 있는데, 구체적으로 얼마나 어떻게 해야 한다는 설명은 없다”며 “우리 같이 작은 사업장에서 별도 예산을 더 마련하기도 쉽지 않다”고 말했다. 오성스프링은 100점 만점에 80점, 중간 단계인 ‘노랑’이 나왔다.

오태환 법무법인 화우 노동그룹장(변호사)은 “안전대진단 항목을 살펴보니 중소 사업주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추상적인 내용이 많았다”며 “구체적으로 ‘이것만 지키면 처벌받지 않아요’라고 알려주는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이 가장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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