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기시다, 김정은 만남 원해" 선제적 공개 北…총선 앞 갈라치기 시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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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 연합뉴스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 연합뉴스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이 25일 일본 측이 '또다른 경로'를 통해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의 정상회담을 제안해왔다고 돌연 공개했다.

북한 비핵화 협상에서 '중간 단계 조치'(interim steps)를 고려할 수 있다는 미국의 대화 제안은 무시하고, 한국을 향해선 탱크 전력 등을 통한 서울 점령을 위협하면서, 일본에는 대화를 매개로 '떠보기'에 나선 모양새다. 제22대 총선(4월10일)을 16일 앞두고 야당은 윤석열 정부의 '대북 강경론'을 비판하고, 여당에선 '종북 세력'을 부각하는 가운데 대화 분위기를 띄우며 국내외 여론 분열을 조장하는 전형적인 갈라치기 시도라는 분석이 나온다.

"만나고 싶다는 의향 전해와"

이날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김여정은 담화에서 "최근에도 기시다 수상은 또다른 경로를 통해 가능한 빠른 시기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장을 직접 만나고 싶다는 의향을 우리에게 전해왔다"고 밝혔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24일 북한군 유경수 제105탱크 사단 지휘부와 직속 제1탱크 장갑보병연대를 시찰하는 모습. 노동신문, 뉴스1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24일 북한군 유경수 제105탱크 사단 지휘부와 직속 제1탱크 장갑보병연대를 시찰하는 모습. 노동신문, 뉴스1

그러면서도 "조일(북·일) 관계 개선의 새 출로를 열어나가는 데서 중요한 것은 일본의 실제적인 정치적 결단"이라며 "단순히 수뇌회담에 나서려는 마음가짐만으로는 불신과 오해로 가득찬 두 나라 관계를 풀 수 없다"고 주장했다.

기본적으로 북·일 접촉의 주도권을 자신들이 쥐고 있다고 부각하며, 공개적으로 일본이 더 절실한 입장이라는 프레임을 짜려는 의도로 보인다. 실제 김여정은 "자기가 원한다고 하여, 결심을 하였다고 하여 우리 국가의 지도부를 만날 수 있고 또 만나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수상은 알아야 한다"고 했다.

회담 문턱은 불변

김여정은 이날 담화에서 일본 정부가 이미 거부 의사를 분명히 밝힌 비핵화·미사일 관련 논의와 일본인 납북자 문제는 북·일 정상회담의 의제가 될 수 없다고 또 주장했다. "주권적 권리행사에 간섭" "더 이상 해결할 것도, 알 재간도 없는 납치문제" 등의 표현을 쓰면서다.

그러면서 "진심으로 일본이 두 나라 관계를 풀고 우리의 가까운 이웃이 되어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보장하는 데 기여하고 싶다면 자국의 전반 이익에 부합되는 전략적 선택을 할 정치적 용단을 내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일본 측의 입장 변화를 촉구했다.

윤석열 대통령,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지난해 8월 18일(현지시간) 워싱턴DC 인근 미국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한미일 정상 공동기자회견을 위해 오솔길을 함께 걸어 오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지난해 8월 18일(현지시간) 워싱턴DC 인근 미국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한미일 정상 공동기자회견을 위해 오솔길을 함께 걸어 오고 있다. 연합뉴스

또 김여정은 "공정하고 평등한 자세에서 우리의 주권적 권리와 안전 이익을 존중한다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자위력 강화는 그 어떤 경우에도 일본에 안보 위협으로 되지 않을 것"이라는 감언이설을 내놓기도 했다.

이를 두고 외교가에선 일본을 한·미·일 3국 협력구도에서 이탈시키려는 의도를 한층 더 노골화한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북·일 간에는 지난 몇 달에 걸쳐 중국 베이징과 동남아 등에서 실무 접촉이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일본 측의 정상회담 제안 사실을 이날 공개한 것도 오는 4월 10일 기시다 총리의 방미 일정을 염두에 둔 택일로 보인다. 미·일 정상회담에서 대북 협상이 의제로 다뤄지기를 노린 측면도 있다.

동시에 대화에 응할 여지를 공개적으로 남긴 것은 안보 이슈가 총선에서 주목받는 분위기가 조성되자 한국 내에서 '전쟁이냐 평화냐'라는 해묵은 질문을 던져 남남갈등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로도 분석된다.

오경섭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일본이 한·미·일 비핵화 공조에서 이탈하지 않으면 정상회담은 없다는 입장을 내비친 것"이라며 "사실상 북·일 정상회담 개최 의지가 없음을 자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 연합뉴스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 연합뉴스

또 어설픈 갈라치기

전문가들은 김여정이 북·일 양국이 물밑에서 진행한 비공개 접촉을 전격적으로 공개한 데도 주목했다. 비공개 협의를 일방적으로 공개하는 것 자체가 외교적 결례에 해당하고, 정상회담이 실제 성사될 가능성은 오히려 줄어드는 전략적 손실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이같은 선제적 공개는 외교적 고립을 탈피할 마땅한 다른 수단이 없다는 것을 방증이기도 한 셈이다. 앞서 김여정은 한국과 쿠바가 전격 수교한 이튿날인 지난달 15일에도 심야 담화를 발표해 "일본이 우리의 정당방위권에 대해 부당하게 걸고 드는 악습을 털어버리고 이미 해결된 납치문제를 양국관계 전망의 장애물로만 놓지 않는다면 두 나라가 가까워지지 못할 이유가 없을 것이며, 수상이 평양을 방문하는 날이 올 수도 있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특히 납치자 문제는 당초 기시다 총리가 김정은과 정상회담을 추진한 근본적인 이유다. 그런데 이를 의제로 삼지 않는 것을 정상회담 개최의 전제조건으로 내세우며 일본을 찔러보는 것은 전형적인 한·미·일 갈라치기 의도라는 분석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실제 일본 정부 대변인인 하야시 요시마사(林芳正) 관방장관은 이날 오후 기자회견에서 "납치 문제가 이미 해결됐다는 (북한의) 주장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북한이 비공개 접촉을 공개한 건 기시다 정부에 대한 압박의 성격도 있지만, 되레 일본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며 "한·미·일의 주요 정치·외교 이벤트를 앞두고 자신들의 존재감을 부각하려는 측면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1월 30일 일본 국회에서 시정 방침 연설을 하고 있는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AFP, 연합뉴스

지난 1월 30일 일본 국회에서 시정 방침 연설을 하고 있는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AFP, 연합뉴스

기시다 "北과 대화 중요"

이에 대해 기시다 총리는 이날 오후 참의원(상원) 예산위원회에 출석해 "이전에 말했듯이 일본과 북한 관계, 납치 문제 등 여러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상회담이 중요하고, 총리 직할 수준에서 북한에 대해 여러 대응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기시다 총리는 이날 저녁 총리관저에서 기자들과 만나 "상대가 있는 얘기"라며 "지금, 결정된 것은 없다"고 말했다.

기시다 총리는 취임 초기부터 납북 피해자 문제를 조속히 해결하기 위해 북한과 정상회담을 추진하겠다고 여러 차례 밝혀왔다. 이를 위해 일본 정부 관계자들이 지난해 3월과 5월 두 차례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북한 조선노동당 관계자들과 비밀 접촉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시다 총리는 지난달 9일 국회에서 북·일 정상회담 추진과 관련해 "구체적으로 여러 활동을 하고 있다"면서 다양한 경로로 접촉이 이뤄지고 있음을 인정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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