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이는 오타니, 그도 피앙세도 그냥 필부필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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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2호 26면

김정효

김정효

서른 잔치는 끝났다. 내가 좋아하는 시집 제목이다. 어떤 일이 끝날 때마다 문득 이 타이틀이 떠오른다. 원래 잔치가 끝나고 나면 조금 우울해지는 법인가. 어릴 때 명절날 오후가 되면 꼭 그랬다. 집안 어른들을 찾아뵙고 세배하고 덕담을 나누며 왁자하게 놀다 집으로 돌아오면 유난히 고즈넉하고 무료했다. 그리고 그 진공같은 고요함에서 우울이 묻어났다.

오타니 선수가 다녀간 후에도 그런 느낌이 들었다. 한바탕 축제인 듯 난리였는데 끝나고 나니 조금 공허하고 허전하다. 왜 그럴까? ‘만찢남’에서 ‘품절남’으로 레테르를 바꾼 탓일까? 하지만 피앙세를 데리고 왔더라도 오타니 선수는 여전히 예의 바른 훈남이었으며 보기 좋았다. 확실히 그에게는 따뜻한 미소를 짓게 만드는 힘이 있다. 운동선수가 가진 건강함에 훌륭한 인성, 잘생긴 외모와 엄청난 퍼포먼스, 게다가 천문학적 금액의 연봉. 이런 완벽에 가까운 조건들이 마치 동화 속 왕자 이미지를 연출했던 거다. 이런 이미지로 인해 도착 당일 인천공항은 팬들과 취재진으로 난리가 아니었다.

이런 들뜬 분위기는 일본이 훨씬 더했다. 일주일 전에 일본의 TV아사히에서 연락이 왔다. 왜 한국의 젊은이들이 오타니 선수에 열광하는가를 알고 싶다며 인터뷰를 요청했다. 작년 세밑 중앙SUNDAY에 실린 내 글이 PD의 눈에 든 모양이었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가 함함하다면 좋아하’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내 잘난 아들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확인하고픈 일본인의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러나 편집된 영상을 보니 뭔가 허전하고 섭섭했다. 결국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골라 듣는구나 싶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오타니를 ‘짤’로만 봐 왔다. 사실 그의 홈런 비거리와 엄청난 변화구는 따로 편집된 스포츠뉴스나 SNS의 짧은 동영상이 전부였다. 이런 사정은 MLB의 팬이 아니라면 다 비슷하지 싶다. 반복적인 짧은 동영상이 오타니에 대한 ‘확증 편향’을 더욱 튼튼하게 만든다. 오타니라는 알고리즘에 의해 그의 존재는 더욱 신비롭고 경이로운 선수로 확대 재생산될 것이다.

세상 이치가 그런가 보다. 인간은 늘 자기 기준으로 세상을 본다. 오타니를 좋아하는 이유도 그가 가진 이미지가 자신을 기쁘게 하기 때문일 터이다. 결국 오타니도 나의 만족을 위해 존재하는 바깥의 존재일 뿐이다. 축제가 끝나고 난 뒤 찾아오는 우울도 그 안과 바깥의 거리 탓인지 모른다. 안과 바깥. 자아와 타자. 이 두 대립항은 일상과 잔치의 구조와 일치한다. 이때 중요한 것이 거리두기이다. 주체는 타자와 거리를 둘 때 비로소 주체가 된다. 이 거리를 윤리적으로 말하면 매너가 되고 에티켓이 된다. 일상이 잔치와 구분되듯 타자는 주체의 바깥에서 언제나 일정한 거리를 두고 존재해야 한다. 자식과 부모도, 친구 사이에도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과도 일정한 거리는 반드시 필요하다. 이 거리를 가늠하지 못할 때 갈등이 있고 싸움이 일어난다.

오타니가 돌아가니 오타니가 다시 보인다. 오타니도 그의 피앙세도 그냥 필부필부(匹夫匹婦)다. 몇 년 동안 그를 뒷바라지해 왔던 통역사가 통장에서 돈을 빼 가도 모르는 물컹한 인간이다. 그의 경기를, 그의 삶을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되 지나치게 몰입하지 말자. 인간은 조금 간격을 둘 때 더 아름답고 오래 간다. 진구구장의 외야석 잔디에 누워 캔맥주를 홀짝거리며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경기를 관전하던 하루키처럼 그렇게 야구를 즐기자. 저녁 소파에 누워 류현진의 삼진에 엄지척하면서 멋지게 살아낸 하루를 위로하는 그 일상의 미학을 오랫동안 즐기자. 그게 사는 맛이다.

김정효 서울대 연구교수·체육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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