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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중앙] 판타지 속 판타지를 찾아서 74화. 트로이아 전쟁

중앙일보

입력

인간적이라 더 매력적인 신들의 이야기

오랜 옛날, 한 고대 도시에서 전쟁이 있었습니다. 트로이아라 불린 도시를 둘러싸고, 강대한 미케네 왕국을 중심으로 그리스와 아시아의 수많은 영웅이 편을 갈라 자그마치 10여 년간 싸웠죠. 한 나라가 멸망하고 많은 사람이 희생된 이 전쟁은 한 여신의 분노와 세 여신의 다툼에서 시작되었는데요. 영웅 펠레우스와 여신 테티스의 결혼식이 그 출발점입니다. 제우스의 손자이기도 한 펠레우스의 결혼식엔 여러 신과 인간이 초대되었는데, 훗날 불화의 신으로 알려진 여신 에리스는 초대받지 못했어요. 화가 난 에리스는 몰래 찾아가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라고 쓰인 황금 사과를 놓아두었죠. 사과를 발견한 여신들은 서로 자기 것이라며 다투었는데, 마지막에 헤라와 아테나, 아프로디테가 남아 경쟁합니다. 판정을 내리지 못한 제우스는 트로이아의 왕자 파리스에게 결정을 내리도록 했는데, 세 여신은 각기 다른 조건으로 파리스를 매수하려 했죠. 결국 파리스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주기로 한 아프로디테의 손을 들었고, 이후 아프로디테는 미의 여신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해요.

페테르 파울 루벤스(1633)의 작품을 보면 황금 사과 하나로 다투는 신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느낄 수 있다. 그리스 신화 속 신들이 신답지 않게 행동하는 것은 그들이 다신교의 신이기 때문이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1633)의 작품을 보면 황금 사과 하나로 다투는 신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느낄 수 있다. 그리스 신화 속 신들이 신답지 않게 행동하는 것은 그들이 다신교의 신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아프로디테가 내어주기로 한 이가 스파르타왕 메넬라오스와 결혼한 헬레나였다는 것입니다. 아프로디테의 협력으로 파리스는 헬레나를 납치해 트로이아로 데려가죠. 분노한 메넬라오스는 미케네의 왕이자 형인 아가멤논에게 상의하고 결국 그리스의 여러 나라가 협력하면서 트로이아 전쟁이 시작됩니다. 10여 년에 걸친 전쟁에는 수많은 영웅뿐 아니라 신들도 참여했죠. 중립을 지킨 신도 있었지만 대개 트로이아와 그리스로 나뉘어 한 편을 응원하며, 때로는 직접 전장에 뛰어들기도 했어요. 심지어 전쟁신 아레스가 트로이아 편에서 싸우다 영웅의 반격으로 다치기도 했죠. 운동 경기를 구경하다 패싸움을 벌이는 극성팬과 다를 바 없습니다.

신은 보통 정의로운 존재, 절대적이고 선한 존재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리스 신화 속 신들이 이처럼 신답지 않게 행동하는 것은 다신교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죠. 다신교는 이름 그대로 여러 명의 신이 존재하는 종교예요. 사실 유대교나 이로부터 시작된 기독교와 이슬람교, 그리고 유대교에 영감을 준 것으로 여겨진 조로아스터교 등을 제외하면 신이 여럿인 종교가 많죠. 이런 다신교에는 ‘태양’이나 ‘바람’처럼 자연의 상징만이 아니라, 인간과 관련한 신이 있는 게 특징입니다. ‘대장장이’ ‘양치기’처럼 직업과 관련한 신도 있지만, ‘질투’ ‘사랑’ 같은 인간의 감정, ‘평화’ ‘침묵’처럼 상황을 바탕으로 한 신도 있어요. 신들의 속성이 다양하다 보니 에리스처럼 불화를 가져오는 신도 있고, 아레스처럼 전쟁, 그것도 끔찍한 전쟁을 선호하는 신도 있죠.

그리스 신화만 그런 것도 아니에요. 수메르의 여신 인안나는 금성과 미의 여신이지만, 대놓고 바람둥이로 유명해서 길가메시가 그의 청혼을 거절합니다. 해당 속성은 그리스의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에 이어져, 그 역시 아레스와 바람을 피우다 남편 헤파이스토스의 함정에 빠져 신들 앞에서 놀림 받았죠. 이집트의 사막의 신 세트는 형제인 오시리스를 죽였고, 조카 호루스에게 살해당합니다. 그리스에선 농경의 신 크로노스가 자기 자식들을 잡아먹었죠. 한국에서도 세상을 창조한 천지왕의 둘째 아들 소별왕이 지상을 욕심내 형 대별왕을 속였고요.

다신교의 신들은 신보다는 인간처럼 보입니다. 트로이아 전쟁에서 편을 갈라 대결했듯 제각기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위해, 자신에게 중요한 것을 위해 행동하기에 사람들도 제각기 좋아하는 신을 택하기 좋죠. 음악가라면 아폴로, 사냥꾼이라면 아르테미스를 숭배하는 게 자연스럽고, 장인이라면 헤파이스토스에게 기도할 것입니다. 하나뿐인 신을 숭배하는 유대교에선 신이 내린 ‘도둑질하지 말라’라는 계율이 절대적이지만, 그리스에선 헤르메스가 도둑을 수호하죠. 범죄자도 지켜주는 신 재밌지 않나요? 헤르메스는 상업의 수호신이기도 한데, 때때로 장사치라 불리며 도적이나 사기꾼 취급을 받는 상인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로 잘 어울리죠. 이처럼 다신교는 하나의 정의나 질서를 믿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도시마다, 각기 자신의 수호신을 따르며, 아침·점심·저녁에 각각 다른 신에게 빌 수도 있죠.

트로이아는 헬레스폰트, 현재는 다르나넬스 해협이라 불리는 길고 좁은 바다 남쪽 아나톨리아 지방 서쪽 끝에 있었다고 합니다. 아시아의 서쪽 끝, 유럽과 이어지는 지방의 중심에 위치해 오래전부터 활발한 교역으로 번영하며 부귀영화를 누렸죠. 트로이아 전쟁은 바로 이러한 부를 노리고 일어났다고 사람들은 이야기합니다. 부유한 나라를 질투하여 단체로 몰려가서 벌인 약탈 전쟁, 지극히 추악하죠. 어쩌면 그리스의 시인들은 이처럼 떳떳하지 못한 이유를 감추기 위해 신들의 이야기를 이용했을지도 모릅니다. 고대는 지금보다 자유분방한 사회였다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사람을 죽이고 때로는 잡아먹는 일도 벌어졌다고 하죠. 다신교의 신들이 벌이는 무참한 행동들은 당시 사람들을 변명하기 위한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끔찍한 일을 감추기 위해 신을 변명거리로 이용하는 것, 너무도 인간적이죠. 그리스를 비롯하여 다신교의 종교들이 대부분 사라진 지금도 이들의 이야기가 꾸준히 나오는 것은, 그러한 인간적인 모습이 매력적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전홍식 SF&판타지도서관장

전홍식 SF&판타지도서관장

※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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