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5대 은행, 1조 날렸다…돈 주고 산 '미국발 시한폭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경제 03면

[경제+] 대출 금액만 6274조원…북미 상업용 부동산 공포

1. 제로금리 때 매입한 빌딩…고금리 계속돼 부실 급증

“위기는 조짐이 나타난 이후 상당 기간이 흐른 뒤에야 폭발한다.”

금융위기 전문가인 카르멘 라인하트 하버드대 교수가 몇 년 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는 2007년 당시 불거진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위기를 두고 한 말이다.

요즘 라인하트 교수의 발언을 소환하는 사건이 진행 중이다. 미국 상업용 부동산(commercial real estate·CRE) 시장에서 위기 조짐이 나타난 지 1년 가까이 흘렀다.

김경진 기자

김경진 기자

발단은 미 연방준비제도(Fed)의 고강도 통화긴축이다. Fed가 기준금리 인상을 멈추고 있다. 고금리 국면이 이어지면서 CRE 가격 하락 폭이 더욱 커지고 있다. Fed의 통화긴축 시기마다 CRE 가격이 하락한 것만은 아니다. 상식과는 달리 오르는 때도 많았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미 Fed가 1960년 이후 11차례 벌인 통화긴축 가운데 이번 사이클의 CRE 가격 하락이 가장 크다. 긴축 시작 순간의 CRE 가격을 100으로 봤을 때 Fed가 2022년 3월 시작한 긴축 사이클의 경우 CRE 가격이 90선 아래로 떨어졌다.

그 바람에 미 CRE 회사가 휘청거리고 있다. 파장은 태평양을 건너 한국에 미치고 있다. 국내 5대 금융그룹인 KB·신한·하나·우리·NH농협의 해외 부동산 투자 손실이 1조원을 넘었다. 해외 부동산 투자 가운데 절반 이상이 몰린 북미 지역의 부진 탓이다.

5대 금융그룹이 각종 펀드를 통해 투자한 해외 부동산은 512건에 이른다. 애초 투자 규모는 10조4446억원이었다. 하지만 요즘 평가가치는 9조3444억원 선이다. 수익률이 -10.53% 정도다.

2. 올해만 1241조 만기 도래…‘대출 돌려막기’ 쉽지 않아

미국 현지에서는 가격 하락 여파로 CRE 관련 대출의 부실(원금과 이자 연체) 비율도 눈에 띄게 상승하고 있다. CRE 가운데 대표 격인 사무 부동산 담보대출의 부실 비율이 6% 선을 넘어섰다.

월가 이코노미스트가 보는 데드라인은 10% 선이다, 부실 비율이 10%를 넘어서면 CRE 사태가 중소 시중은행을 본격적으로 뒤흔들 수 있기 때문이다.

정근영 디자이너

정근영 디자이너

최악은 아직 오지 않은 듯하다. 미 예보공사 등에 따르면 CRE 대출은 무려 4조7000억 달러(약 6274조원)에 이른다. 시중은행뿐 아니라 사모펀드 등이 제로 금리 시대에 공격적으로 빌려준 탓이다.

이 가운데 2024년 안에 만기가 도래해 갚아야 하는 규모가 9300억 달러(약 1241조원)로 집계됐다. 애초 예상은 약 7000억 달러 선이었다.

그리고 2025년부터 2028년까지 4년 동안 만기가 되는 CRE 관련 대출금은 모두 1조1000억 달러 수준이다.

CRE 회사는 만기를 연장받거나 새로 자금을 조달해 빚을 갚아야 한다. 요즘 같은 시장 상황에서 시중은행과 펀드, 보험회사 등이 새로 대출해 주거나 만기를 연장해줄 가능성이 크지 않다.

금융회사가 돈을 빌려준다고 해도 금리가 제로 금리 시대보다 몇 배 높을 수밖에 없다. 가격 하락과 공실률 급증에 시달리고 있는 부동산 회사가 고금리를 감당하기 쉽지 않다.

3. “최악 땐 은행 300곳 휘청”…미국내 ‘음울한 시나리오’

그 바람에 음울한 시나리오가 제시되고 있다. 전미경제연구소(NBER)가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CRE 사태가 터지면 미 중소 시중은행 가운데 적게는 수십 곳에서 많게는 300곳이 지급 능력을 상실할 수도 있다.

미 사무용 CRE대출 부실 비율 그래픽 이미지. [자료제공=미 예금보험공사 등]

미 사무용 CRE대출 부실 비율 그래픽 이미지. [자료제공=미 예금보험공사 등]

지급 능력 상실은 일시적인 유동성 위기와는 다른 말이다. 은행을 정리한 뒤에도 지급의무를 다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래리 서머스 전 미국 재무장관도 블룸버그TV와의 인터뷰에서 “정부가 시중은행 금융규제를 강화하는 것보다 현재 발등의 불인 CRE 사태를 우선 처리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4. 한국, 해외 부동산 56조…투자 손실 2조 훌쩍 넘어

금융감독원 ‘해외 부동산 대체투자 현황’에 따르면 지난해 9월 말 기준 금융사의 해외 부동산 대체투자 잔액은 56조4000억원이다. 이 중 보험사가 31조9000억원(56.6%)으로 가장 많고, 은행(10조1000억원·17.9%), 증권사(8조4000억원·14.9%) 순이었다.

전체 투자 금액 중 사업장이 어디인지 파악 가능한 단일 사업장에 들어간 돈은 35조8000억원이었다. 이 중 기한이익상실(EOD)이 된 금액은 2조3100억원(28개)으로 전체 투자금액의 6.46%다. EOD란 선순위 채권자에게 이자 혹은 원금을 못 주거나, 자산가치 하락으로 LTV(담보인정비율) 조건이 미달한 사업장을 의미한다. 상황에 따라 손실을 우려한 금융사들이 만기 전에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는 상태다. 금감원 파악 결과 EOD 사업장은 지난해 9월 이후 3개 더 늘어나 손실 우려 투자액도 2조4600억원까지 증가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