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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정탁의 인문지리기행

청·일 각축 속에 좌절된 조선인에 의한 개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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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견지동 우정국 청사와 갑신정변

김정탁 노장사상가

김정탁 노장사상가

서울 종로구 견지동 조계사 입구에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큰 한옥이 보인다. 조선말 우정총국 청사인데 개관식 날 갑신정변이 일어난 건물로 유명하다. 갑신정변은 김옥균·박영효·홍영식 등 급진 개화파가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실패해 삼일천하로 끝난 정변이다. 처음에는 고종도 이들과 손잡고 민씨 정권 배후의 청나라 세력을 추방하려 했지만, 청의 개입으로 실패하는 바람에 조선은 점점 더 청에 종속되고, 고종도 민씨 정권에 의해 더욱 휘둘렸다. 역참제에서 벗어나 근대적 체신 행정을 펴려 했던 홍영식의 꿈도 무산돼 우정총국 건물은 더욱 을씨년스러워졌다.

일본 등에 업은 개화파 거사 현장
청 개입해 실패 후 뿔뿔이 망명길

일 대중은 “김옥균은 조선의 쑨원”
책임 캥긴 일 정부는 외딴섬 가둬

피습 암살, 시신 유린에도 무관심
청일전쟁 몰아가는 데 죽음 활용

사람들은 갑신정변의 실패를 안타깝게 여긴다. 이 정변이 성공해 내정개혁을 이루었다면 조선이 쉽게 무너지진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 때문이다. 당시 서구 열강은 동아시아에 탐욕의 손길을 뻗었는데 이를 뿌리치기 위해선 한·중·일 세 나라의 화합과 공동보조가 중요했다. 이에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로 대표되는 일본 지식인들은 삼화주의(三和主義)를 주창했다. 안중근 의사가 피력한 동양평화론도 삼화주의와 맥을 같이 한다. 김옥균도 삼화주의에 심취해 리훙장(李鴻章)과 담판을 벌이기 위해 상하이로 떠날 때 여권에 이와타(岩田) ‘미와(三和)’란 이름을 사용했을 정도다.

조선 내정개혁에 청·일 딴생각

서울 견지동 조계사 경내에 있는 우정총국 청사. 1884년 12월 4일 개관식 현장에서 김옥균 등 개화파가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사진 김정탁, 중앙포토]

서울 견지동 조계사 경내에 있는 우정총국 청사. 1884년 12월 4일 개관식 현장에서 김옥균 등 개화파가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사진 김정탁, 중앙포토]

당시 삼화주의 구현을 위해선 한·중·일 내정개혁이 전제돼야 했다. 이에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통해 내정개혁을 이뤄냈고, 청은 양무(洋務) 및 변법자강(變法自疆) 운동을 통해 내정개혁에 착수했다. 조선의 내정개혁만 더뎌져 삼화주의 구현에 유일한 장애물이었다. 심지어 조선은 동아시아의 병자(病者)란 소리를 들었지만, 조선의 후견인을 자처한 청나라조차 조선의 내정개혁에 무관심했다. 반면 일본은 조선이 내정을 개혁해야 청에서 독립할 수 있다고 믿어 개혁을 채근했다. 조선의 내정개혁을 둘러싸고 청과 일본은 이런 물과 기름의 관계였다.

청의 이런 태도에 일본 지식인들은 분개했다. 조선의 개혁이 늦어져 조선이 동아시아의 병자로 계속 남으면 구미 열강의 좋은 먹잇감이 돼 일본 안보가 위태로워져서다. 한반도 부근에서 부동항을 찾기 위해 눈알을 부라렸던 러시아의 행보가 이를 잘 말해준다. 그래서 일본 지식인들은 조선의 내정개혁을 위해서라도 메이지유신과 같은 쿠데타가 조선에서 일어나길 바랐다. 또 청의 압박에서 벗어나려면 일본 힘을 빌려야 한다는 사람들도 조선에서 생겨났는데 개화당 내지는 독립당을 자처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일본 힘을 빌리려고 했으니 당연히 친일파다.

1884년 8월 베트남에서 터진 청불전쟁은 조선에서 쿠데타가 일어날 좋은 여건을 만들었다. 청은 이 전쟁을 지원하느라 조선에 주둔한 군사 3000명 중 절반을 빼냈는데 주둔군 수가 줄면 조선에서 청의 영향력도 줄게 마련이다. 이처럼 정세가 청에 불리해지자 일본은 자신의 국익에 부합하는 정권을 조선에 수립하려 했고, 조선의 급진개혁파도 이에 호응해서 그해 12월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당시 일본 총리였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청과의 정면충돌을 우려해 쿠데타 지원을 주저했지만, 청불전쟁을 틈타 조선에서 청나라 세력을 일소하려 했던 외상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의 의도대로 일이 진행되었다.

일, 프랑스에 정변 후원 100만 달러 요청도

서울 북촌로5길 정독도서관 안에 있는 김옥균 집터 표지석. [사진 김정탁, 중앙포토]

서울 북촌로5길 정독도서관 안에 있는 김옥균 집터 표지석. [사진 김정탁, 중앙포토]

일본의 자유민권운동 지도자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와 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郞)도 쿠데타를 후원하기 위해 주일 프랑스 공사 생퀴지를 만나 100만 달러를 요청했다. 조선에서 쿠데타가 일어나면 가장 큰 이득을 볼 나라가 청과 전쟁을 벌이는 프랑스여서 조선에 경제적 원조를 해줘야 한다는 취지에서다. 일본의 야권도 조선의 내정개혁에 대해 이처럼 관심이 높았다. 청의 북양대신 리훙장이 이런 분위기를 감지해 프랑스와 서둘러서 협상을 체결하려 하자 이를 눈치챈 청의 조선 감독관 위안스카이(袁世凱)는 무력으로 갑신정변을 신속히 제압했다.

쿠데타가 실패하자 갑신정변 주역들에게 곧바로 재앙이 닥쳤다. 홍영식은 붙잡혀서 처형됐고, 영의정을 지낸 그의 아버지 홍순목은 손자와 함께 자살했다.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은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 일행과 제물포로 가서 배를 타고 일본에 망명하려 했다. 이때 다케조에 공사가 이들의 지토세마루(千歲丸) 승선을 거부했다. 공사 자신이 개입했음에도 정변이 실패해 정변의 증인들을 일본으로 데려가는 게 꺼림칙해서다. 또 이들의 망명이 일본 정부에 큰 부담을 주어서다. 공사의 이런 처신에 분노한 일본인 선장의 거친 항의로 간신히 승선할 수 있었다.

이들이 망명했어도 일본 정부로부터 찬밥 신세였다. 일본 정부의 이런 태도는 갑신정변이 자신들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을 대내외에 보여주고 싶어서다. 그러면서 즉시 미국으로 떠날 것을 요구해 박영효·서재필·서광범 등은 미국으로 향했다. 조선 정부는 일본에 남은 김옥균을 체포해서 인도해 달라고 계속해 요청했다. 일본은 자신들이 이용했던 인물을 손바닥 뒤집듯이 사지로 내몰 순 없어도 그렇다고 눈에 띄게 보호해 줄 수도 없었다. 그래서 김옥균은 한때 태평양 위의 절해고도인 오가사와라에 보내졌다가 다시 홋카이도 삿포로로 옮겨지기도 했다.

김옥균, 리훙장과 담판하려다 피살

갑신정변의 주역들. 왼쪽부터 박영효·서광범·서재필·김옥균. [사진 김정탁, 중앙포토]

갑신정변의 주역들. 왼쪽부터 박영효·서광범·서재필·김옥균. [사진 김정탁, 중앙포토]

한편 일본 민간에선 ‘조선의 쑨원(孫文)’이라며 김옥균을 뜨겁게 맞이했다. 이런 큰 환영을 받았어도 9년여에 걸친 망명 생활 중 조선 개혁을 위해 단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는 자책감으로 낙천주의자였던 김옥균도 점점 좌절감에 빠졌다. 그래서 돌파구가 필요했는데, 청의 실력자 리훙장을 만나 조선에서 손을 떼라는 데서 이를 찾으려 했다. 이 담판을 위해 그는 상하이로 건너갔는데, 이 여정이 자신을 죽이기 위한 조선 정부의 음모라는 걸 눈치채지 못한 채 조선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 홍종우의 총에 맞아 44살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쳤다.

차준홍 기자

차준홍 기자

그의 시신이 한강 양화진에서 효수된 뒤 조각난 살점들은 전국 8도에 뿌려졌다. 그런데 상하이 영국 조계지에서 피살된 그의 시신이 어떻게 해서 조선에 인도되었을까? 김옥균에 치를 떨던 민씨 정권이 청나라에 로비한 결과이지만 시신 인도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했던 일본 정부도 한몫했다. 김옥균 시신이 조선에 가면 처참히 처리될 걸 뻔히 아는 일본 정부였어도 무관심으로 대응하는 게 오히려 낫다고 봐서다. 그리고 ‘청이 김옥균의 시신까지 빼앗아 조선으로 돌려보냈다’라는 식으로 청에 대한 일본인의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활용했으니 무관심은 일종의 음모였다.

김옥균의 시신이 부관참시되자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文麿) 공작,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 등 일본의 유력 정치인 100여 명이 모여서 ‘김옥균 사건 연설회’라는 미증유의 집회를 열었다. 이런 분위기가 청일전쟁의 중요한 도화선이 되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김옥균이 암살된 지 불과 4개월 만에 청일전쟁이 터졌다. 이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해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고, 조선도 청나라 영향권에서 일본 영향권으로 그 소속이 바뀌었다. 그러니 일본 정부는 김옥균의 죽음을 최대로 활용해 오랜 목표를 이룬 셈이다.

김옥균 묘비 “비상한 재주 비상한 시대 만나”

갑신정변의 주역들은 유력한 집안의 자식들이다. 쿠데타를 도모하지 않았으면 특권층 자녀로 부족함이 없이 누리면서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힘든 길을 택했다가 불우하게 삶을 마쳤다. 『장자』 '인간세'에서 “길을 걷지 않기란 쉬워도 땅을 밟지 않고 걷기란 어렵다”라고 말한다. 이들이 누리면서 사는 쉬운 길을 버리고, 도전하며 개혁하는 어려운 길을 택했으니 바른길을 걸은 셈이다. 그렇더라도 쿠데타에 외세를 끌어들이면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 하는 인식에선 안이하지 않았나. 갑신정변으로부터 26년이 지난 뒤 조선이 일본에 합병됐다는 사실이 그 증거다.

도쿄 아오야먀 레이엔(靑山靈園)의 외국인 묘지에 있는 김옥균 묘비에 이렇게 쓰여있다.

비상한 재주를 지니고
비상한 시대를 만났으나
비상한 공을 이루지 못한 채 
비상하게 죽은 김옥균 공이여.

김정탁 노장사상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