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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정하 논설위원이 간다

“선거구획정위 권한 강화해 한국 정치 고질병 끝내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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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김정하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4년마다 반복되는 선거구 획정 지연 사태

김정하 논설위원

김정하 논설위원

4·10 총선이 다가오면서 요즘 여야가 매일 지역구 공천자 발표를 하고 있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공천자 명단은 모두 무효다. 아직도 국회가 선거구 획정을 완료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공직선거법에 따르면 국회는 총선 1년 전에 선거구를 획정해야 한다. 하지만 1년 전은 고사하고 선거가 임박해서야 허겁지겁 선거구를 확정하는 건 한국 정치의 고질병이다. 2012년 총선은 선거일 D-44에, 2016년 총선은 D-42에, 2020년 총선은 D-39에 선거구획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갈수록 늦어지는 추세이니, 이번 총선은 선거구 획정의 늑장 신기록을 세울지도 모른다.

“선거 1년 전 획정” 규정 사문화
획정 늦어질수록 현역만 유리

국회 손놓고 있다 벼락치기 요구
21대 획정위원 “사실 졸속” 토로

획정위가 시·도 의석 결정하고
선거 6달 전 자동 확정되게 해야

국회의장은 지난 19일 국회 본회의에서 “선거 6개월 전까지 선거구를 확정하지 못하면 선거구획정위 제출안을 그대로 확정하도록 법에 규정하자”고 제안했다. [뉴스1]

국회의장은 지난 19일 국회 본회의에서 “선거 6개월 전까지 선거구를 확정하지 못하면 선거구획정위 제출안을 그대로 확정하도록 법에 규정하자”고 제안했다. [뉴스1]

선거구 획정이 지연되면 지명도 높은 현역 의원이 유리하고, 정치 신인은 이름을 알릴 기회가 줄어들어 불리해진다. 국회가 선거구 획정을 서두르지 않는 이유 중 하나다. 또 출마를 선언했다가 뒤늦게 선거구가 조정되면서 지역구가 사라져 출마를 못 하는 황당한 사례까지 생겼다.

2016년 헌법재판소는 국회가 선거구 개정시한을 넘겨 선거구를 획정한 것은 위헌이라는 헌법소원심판 청구를 재판관 5(각하) 대 4(위헌) 의견으로 각하하면서도 “국회는 선거구 공백 상태를 초래했고 선거운동의 자유가 온전히 보장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당시 헌재는 이미 선거가 끝났다는 이유로 청구를 각하했지만, 위헌 의견이 4명이나 나온 것은 실질적으로 위헌 결정이나 마찬가지란 평가가 나왔다.

4년 전 획정위원들의 고백

선거 때마다 반복되는 폐단에 대해 비판 여론이 비등하자 국회는 2015년 선거구 획정을 여야 협상이 아니라 선거구획정위원회라는 독립기구에 맡기는 방안을 도입했다. 그런데도 늑장 행태가 여전히 개선되지 않는 이유가 뭘까. 현 선거구획정위 멤버들을 접촉해 얘기를 들어보려 했으나 아직 여야 물밑 협의가 진행 중이라는 이유로 전부 인터뷰를 고사했다. 그래서 대안으로 4년 전 21대 총선 때 선거구획정위에서 활동했던 인사들에게 속사정을 들어봤다. 사실 그사이에 환경이 달라진 게 거의 없기 때문에 이들의 진단은 현 상황에도 그대로 통용된다고 할 수 있다. 다음은 4년 전 선거구획정위에서 활동했던 지병근 조선대(정치외교학) 교수와의 일문일답.

선거구획정위를 설치해도 국회의 늑장 관행은 별로 개선된 게 없다. 무엇이 문제인가.
“선거구 획정 작업을 시작하려면 먼저 광역단체별 의석수가 할당돼야 한다. 그런데 현행법상 광역단체별 의석수를 누가 정할 건지 권한의 법적 소재가 애매하게 돼 있다. 현실적으론 국회가 정할 수밖에 없는데, 국회가 그 부분을 손 놓고 있으면 획정위가 아무리 일찍 구성돼 봤자 구체적인 일을 진행할 수가 없다.”
획정위의 권한이 부족한 것인가.
“그렇다. 실무적인 부분에서도 애로가 있다. 현 선거법은 선거구 획정시 자치시군 경계를 임의로 변경할 수 없도록 엄격히 규제하고 있다. 정략적 의도에서 행정구역 일부만 떼어 내 다른 구역과 합치는 게리맨더링을 방지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일부 분할 금지’ 규정 때문에 획정위가 선거구를 조정할 때 작업이 너무 경직되는 측면이 있다. 가령 4년 전에 인구증가로 전남의 순천을 분구해야 했는데, 저 규정에 묶여 전남의 거의 모든 선거구를 뜯어고쳤다. 하지만 그 안을 국회에 제출했더니 국회는 순천과 다른 지역의 일부를 통합하는 예외를 도입해 전남 전체 선거구 조정을 최소화했다. 획정위에도 그런 예외를 도입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면 좋을 것이다.”
획정위 활동에서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무엇인가.
“획정위에서 광역단체 의석수를 빨리 정해달라고 계속 국회에 요청했는데도 여야가 아무것도 안 하고 있더니, 선거가 다가오니까 그제야 갑자기 1주일 시간 줄 테니 빨리 선거구 획정하라고 요구하더라. 이건 너무 폭력적 방식이라는 생각에 화가 나더라. 당시 획정위원들이 시한에 맞추려고 엄청 애를 먹었다.”
현행 규정에 따르면 획정위가 선거구획정안을 국회에 내면 국회는 1차에 한해 수정요구를 할 수 있고, 획정위가 수정안을 내면 국회는 지체 없이 수용하게 돼 있는데.
“그 부분도 법적으로 허술하다. 가령 국회의 수정 요구에 대해 획정위가 ‘획정안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버티면서 수정안 제출을 안 하면 어떻게 될지 명확한 규정이 없다. 극단적 가정이지만 획정위가 수정안 제출을 질질 끌다가 막판에 위원들이 일괄 사표를 던지면 선거를 못 치를 수도 있다. 또 선관위가 수정안을 냈을 때 국회가 또 거부하면 그 뒤엔 어떻게 되는지도 모호하다. 보완 입법이 꼭 필요하다고 본다.”

“1년 전 확정 규정 어기면 페널티 줘야”

김영옥 기자

김영옥 기자

22대 총선 선거구획정위는 지난해 12월 5일 서울 노원 갑, 을, 병을 갑, 을로 통합하고, 전북에선 4개 선거구를 통합해 정읍-순창-고창-부안, 남원-진안-무주-장수, 김제-완주-임실의 3개로 조정하는 것 등을 골자로 한 획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대신 인천과 경기는 1석씩 증가한다. 선거 1년 전이란 법정시한을 크게 어겼지만 이마저도 여야의 늑장처리를 보다 못한 김진표 국회의장의 재촉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획정위의 안에 대해 더불어민주당이 자신들의 강세 지역에서 선거구가 2개 주는 것은 수용할 수 없다고 반발하면서 아직 확정을 못 하고 있다. 결국 22대 획정위도 밤샘 초치기를 할 가능성이 커졌다. 조정 대상으로 거론되는 지역구에 출마한 후보들은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니 노심초사하고 있고, 유권자들도 혼란스럽다.

21대 총선 선거구획정위 멤버였던 윤광일 숙명여대(정치외교학) 교수는 “막판에 시간이 워낙 없으니 선관위 실무팀이 조정대상 선거구마다 A안, B안을 올리면 획정위원들이 그중 하나를 선택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며 “선관위의 양심과 전문성을 믿긴 하지만 A·B안이 법에서 규정한 생활문화권, 교통, 지리적 여건 등을 제대로 반영한 것이지, A·B안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는지 차분히 검증할 여유가 없더라”고 말했다. 윤 교수는 “4년 전 최종 획정안은 시간을 일주일 정도 줬는데, 실제로는 딱 이틀 밤샘 작업으로 만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며 “사실 졸속이라고 비판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고 털어놨다. 윤 교수와의 문답.

과거엔 선거구획정위원끼리 충돌이 심했다는 얘기가 나왔다.
“20대 획정위 때만 해도 정당 추천 인사들이 있어서 획정위 내부에서 여야의 대리전이 벌어졌다고 들었다. 그러나 21대 획정위부턴 정당 추천제를 없애고 학계·법조계·시민단체 등으로부터 추천받은 인사들로 위원회를 구성해 정파적 갈등 상황은 크게 줄었다.”
선거구 논의 때 외부 압력은 없나.
“사실 꽤 있다. 각 당에서도 연락이 오고 조정 지역으로 거론되는 선거구 관계자들도 전화가 온다. 위원들이야 최대한 원칙대로 하려고 하지만 물밑에서 그런 연락을 받으면 압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현행 선거구 획정제도에 개선점을 제안한다면.
“선거법에는 총선 1년 전에 선거구를 획정하라고 돼 있지만 한 번도 지켜지지 않는 건 의원들이 어겨도 아무런 페널티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획정시한을 어기면 불이익이 돌아가도록 법을 개정해야 한다. 또 획정위의 결정 권한을 강화해 정치권 눈치를 안 보고 소신껏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독립성을 보장해야 한다. 지금은 선수가 경기규칙을 직접 만드는 꼴 아닌가. 획정위에 광역시·도 의원 정수를 결정할 권한만 부여해도 획정 절차가 크게 빨라질 것이다. 선거구 획정위원들이 4년마다 계속 바뀌기 때문에 전문성이 축적되지 않는 것도 풀어야 할 문제다.”

획정위 독립성 강화 요구 커져

이와 관련, 김진표 의장은 19일 임시국회 개회사에서 “선거제와 선거구 획정을 두고 4년마다 반복되는 파행은 국민의 참정권을 침해하는 일”이라며 “선거구 획정 기한을 현행 선거일 전 1년에서 6개월로 현실화하고 6개월 전까지 확정하지 못할 경우 선거구획정위가 제출한 획정안 그대로 확정하도록 법에 규정하자”고 제안했다. 학계의 의견도 선거구획정위의 독립성과 권한을 더욱 강화하자는 쪽으로 모인다.

이재묵 한국외대(정치외교학) 교수는 “현행 선거법엔 시·도별 의석수를 누가 결정할지 규정이 없어서 획정위가 법정시한을 계속 어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앞으로는 시·도별 의원정수 확정 권한을 획정위에 부여하고, 선거일 6개월 전까진 자동적으로 획정안이 정해지는 방향으로 선거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