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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동호의 시선

이승만이 깐 레일 위를 달리는 한국 경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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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동호 기자 중앙일보
김동호 경제에디터

김동호 경제에디터

다음 달 20일 미국 국회의사당 상영까지 확정된 다큐멘터리 ‘건국전쟁’은 소문대로였다. 영화가 끝날 무렵 관객들은 조용히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현대사의 나열이 아닐까 예상했지만 성급한 예단이었다. 3억원을 들여 어떻게 이런 영화를 만들었을까 싶었다. 김덕영 감독이 자료를 찾느라 얼마나 많은 발품을 팔았을지도 가늠하기 어려웠다.

영화는 영문 제목처럼 대한민국의 탄생(The Birth of Korea)을 오롯이 보여줬다. 기적에 가까운 대한민국판 오디세이라고 할 수 있다. 101분에 그 과정을 입체적 맥락으로 담아 영화의 완성도를 높였다. 다큐인데도 지루할 새 없이 관객을 끝까지 몰입시키는 힘은 생생한 자료의 뒷받침이 있어서 가능했을 듯싶다.

건국전쟁 통해 경제 리더십 조명
농지개혁, 한국은행, 시장경제 등
남북한 지도 밝기의 차이가 입증

아쉬웠던 건 시간적 제약 때문에 이승만의 경세제민(經世濟民)의 리더십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는 한국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설계자였다. 영화에선 그의 경제 정책으로 교육 확대, 농지개혁, 원자력 도입 정도를 꼽았다. 이 정도로는 그의 경제적 업적을 다 설명할 수 없다. 대통령기록관에 오른 그의 199개 정책 중 과반이 경제 발전 관련이다. 이승만은 가는 곳마다 경제 발전을 외쳤다. 그는 경제 대통령이었다.

이승만은 재임 중 한국 곳곳에 경제 발전의 씨앗을 뿌렸다. 초가집투성이던 주거 환경을 바꾸는 일에서부터 국가재정 정비와 외국인 투자자 유치, 공업화 추진을 위한 생필품 공장 건설에 이르기까지 경제 발전에 필요한 모든 정책을 개시했다. 농민을 위한 양곡 매수와 노동자를 위한 근로기준법도 그의 작품이다. 특히 공업화를 촉진해 많은 회사와 일자리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했다. 회사와 일자리가 있어야 국민이 세금을 납부할 수 있고 국가 재정이 건전하게 돌아갈 수 있다는 경제 원리를 거듭 설파했다.

건국전쟁에서 화폐개혁이 아예 언급 안 된 것은 특히 아쉽다. 언어와 문자가 없으면 국가를 이루기 어렵듯 화폐 독립 없이는 자립 경제 구축이 불가능하다. 한국은 해방 이후에도 일제가 만들어 놓은 조선은행권을 사용했다. 일제의 한반도 경제 침탈 도구였다. 자체 제작한 화폐가 필요했지만 해방 후 그럴 형편이 되지 못했다.

이승만은 경제 체제의 근본 인프라가 화폐라는 걸 꿰뚫고 한국은행 설립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1950년 6월 12일 한은이 설립됐지만 업무 개시 13일 만에 북한의 남침으로 물거품이 될 위기에 몰렸다. 이승만은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시 금융·통화·외환 체계를 신속하게 구축해 한국은행권 발행에 박차를 가했다.

최초의 한국은행권은 1950년 6월 29일 일본 내각 인쇄국에서 제조됐다. 1000원권·100원권 두 가지 권종으로 모두 154억3000만원 규모를 찍어 미 군용기 편으로 김해공항으로 들여와 7월 22일 피난지인 대구에서 유통했다. 이 덕분에 북한군의 위조지폐 살포에 맞서 전시 경제체제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조선은행권이 금지되고 한국은행권이 자리를 잡았다. 전시 물가 폭등으로 화폐단위 평가절하(리디노미네이션)까지 거치면서 두 차례 화폐개혁이 이뤄졌다. 이런 진통을 거친 덕분에 훗날 박정희 정부에서 3차 화폐개혁에 이를 수 있었다. 세금을 걷고 재정을 투입하고 지하경제를 흡수할 수 있는 핵심 인프라가 바로 화폐다. 그 틀을 이승만이 만들었다.

이승만이 만든 레일 위를 박정희가 달릴 수 있었다는 김덕영 감독의 해석이 바로 이런 거다. 외국인 투자자를 적대시하지 말라는 것도 이승만은 누누이 강조했다. 일제 수탈 때문에 외세에 대해 거부감을 갖게 됐지만 우리가 외국 물건을 사지 않고 시장을 폐쇄하면 외국도 우리 물건을 사지 않는다고 역설했다. 중화학 산업의 기본 설계 역시 그의 업적이다. 이승만의 독려로 건국 이후 첫 비료공장 건설계획이 세워진 것은 1955년부터였다. 당초 1958년 충주비료공장을 준공할 예정이었으나 자금 부족으로 지연돼 1961년 4월에야 준공됐다. 박정희에겐 큰 살림 밑천이 됐다.

경제 리더십의 결정판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이었다. 해방 후 미국은 얻을 게 없는 한반도에서 떠나고 싶었지만 이승만은 공산화에 대처해야 한다면서 한국전쟁 전부터 미국을 설득했다. 북한의 남침은 이승만의 혜안을 증명했다. 이 같은 안보·경제 발전의 우산 아래 한국은 선진국 문턱에 올라섰다. 영화 전반부에 나오는 동북아 지도에서 북한은 컴컴하고 한국은 빛을 발한다. 이승만은 그 차이를 만든 주춧돌을 놓았다. 한국 경제는 이렇게 만들어진 이승만의 레일 위를 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