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진의 전지적 시네마 시점
LA 오렌지 카운티에서 ‘고요 하우스’라는 최고급 플랜트 하우스, 곧 꽃집을 운영하며 살아 가는 40대의 중국인 2세 에이미 롸우(그녀는 1984년생이다)는 최근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다. 이제는 오랜 시간 일군 회사를 매각하고 소원대로 딸 준(레미 홀트)만을 키우고 살아가는 전업 주부가 되고 싶어한다. 고요 하우스는 최근 미국 내 최대 체인마트 중 하나인 포스터스(월마트 같은)에 막대한 금액으로 매각을 협상 중이다. 포스터스의 CEO 조던(마리아 벨로)은 에이미(알리 웡)를 들었다 놨다 하며 도통 오퍼를 넣지 않는다. 에이미의 남편인 일본인 2세 조지 나카오(죠셉 리)는 세계적인 디자이너 나카오의 아들이다. 선친은 마치 프리츠 한센처럼 의자 디자인으로 유명하다. 나카오의 의자 ‘다마고’는 한센의 ‘에그 체어’마냥 수십만 달러짜리다. 그러나 아들 조지는 예술이라고 할 수 없는 화분 디자인을 하며 살아간다. 사실상 전업 주부다. 에이미는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부부생활에 불만이 많다. 그중 하나의 요소가 섹스다. 에이미는 집안 금고에 숨겨 둔 권총으로 종종 ‘은밀한 짓’을 한다. 그녀는 어느 날 포스터스에 갔다가 일생일대의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미 콘텐트 업계, 한국용 앞다퉈 제작
한국인 2세 대니(스티븐 연)는 동생 폴(영 마지노)과 함께 말이 좋아 건설업이지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노가다’ 일로 연명한다. 원래는 부모가 드라이브 인 모텔을 운영했으나 사촌 아이작(데이빗 초이)이 룸 하나를 밀수품 창고로 쓰는 바람에 경찰에 적발됐고 결국 한국으로 추방 아닌 추방이 된 상태이다. 모텔도 넘어갔다. 대니는 부모를 다시 LA로 데려오려고 노력하지만 도통 되는 일이 없다. 동생 폴은 게임에만 빠져 산다. 대니는 빚에 쫓긴다. 블록체인에 넣은 돈도 날리기 일쑤이다. 좋아하던 한국인 여자 빅토리아(알리샤 지희 킴)에게 진작에 차였다. 그는 자꾸 숯불 버너 같은 것을 마트에서 사곤 하는데 종종 딴 생각, 위험한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다 말다를 몇 번, 그날도 포스터스에서 산 버너를 반품하려고 갔다가 주차장에서 차량 접촉사고 시비가 붙고 만다. 대니의 픽업 트럭은 에이미 롸우의 고급 SUV와 부딪힐 뻔하고 격렬한 보복 운전과 추격전을 시작한다. 둘의 싸움은 일명 ‘로드 레이지(Road rage)’란 타이틀로 온라인을 뜨겁게 달군다. 대니와 에이미는 이제 물러설 수 없는 일생일대의 싸움을 벌여 나간다. 둘의 인생·가족·비즈니스 모두 크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최근 국내 매스컴은 이성진 감독이 만든 넷플릭스 드라마 ‘성난 사람들(beef)’이 에미상에서 무려 8개 부문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며 ‘석권’, ‘쾌거’ 같은 올림픽 단어를 쏟아냈다. 평단에서는 이 드라마가 작품상과 감독상·남녀주연상까지 모두 가져갈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넷플릭스 작품이었고, 넷플릭스가 아무리 마케팅의 귀재라 한들, 극본상과 ‘많이 가 봐야’ 감독상까지라고 내다봤다. 그런데 최고상인 작품상을 탔다. 흥분할 만한 ‘사건’인 것은 분명했다. 게다가 작품상·감독상·남우주연상·여우주연상·극본상·의상상·캐스팅상·편집상 등 수상 면면을 봐도 주요 부문을 휩쓴 것이었다.
국내 언론은 감독 이성진을 비롯해 남우주연상의 스티븐 연이 한국인 2세(엄밀히 말하면 1.5세. 한국에서 태어나 어릴 때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간 세대)인 점에 주목했다. 드라마에서 한국어가 들리고, 주인공이 ‘엄마, 아버지’ 소리를 하고, LG 밥솥이 나오고, 다 놀다가 결혼할 때는 참한 한국인 여자와 해야 한다는 식의 얘기가 나오고, 한국인 이민자들이 생활하는 데 있어 중심이 되는 한인교회가 비중있게 나오는 등등 한국적 풍경이 미국 드라마의 한복판에서 펼쳐졌다는 점에 집중했다. 그런데도 미국 방송드라마 최고상인 에미상 시상식에서 8개 부문을 탔다는 건 곧 한국이 바야흐로 미국의 중심이 됐다라거나, 혹은 한국 생활문화가 미국과 세계의 중심이 됐다라거나, 그럼으로써 더 나아가 한국이 최고 국가 반열에 올랐다는 식의, 민족적 자부심을 자극하는 기사들이 넘쳐나기 시작했던 이유이다.
‘성난 사람들’의 성과는 한국인 2세가 1세와 달리 미국 주류사회로 완전히 들어섰음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민 1세는 세탁소와 청소부, 스쿨버스 기사 등 하층계급의 노동으로 아이들을 키워내 메인스트림에 걸맞는 인재들로 성장시켰다. 여기까지는 모두가 다 아는, 진부한 얘기이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이민 한인 2세는 고생스러운 부모의 백업, 뒷바라지의 이미지가 보다 강했던 것이 사실이다. ‘성난 사람들’은 그걸 넘어서서 2세대가 지닌 ‘자립의 정체성’과 그 이미지를 확고하게 보여 준 작품이다. 극중에서 대니는 끈기 있게 엄마의 한숨과 자조를 달래며 자신이 집안의 리더임을 보여주려 애쓴다. ‘성난 사람들’ 속에 나오는 한인 2세가 이제 더 이상 어린 2세들이 아니며 그들 역시 엄혹한 세상에 나가 있고, 그에 맞서 싸우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 꽤나 감동적인 측면도 있다.
‘성난 사람들’이 보여주는 것이 단순히 미국 내 한인 커뮤니티의 확장성만은 아니다. 한인들의 영향력이 커졌기 때문에 이런 드라마가 나왔다는 말은 그냥 다 갖다 붙이는 말일 뿐이다. 그보다는 미국 내 제작자들이 어느 순간부터 저 멀리, 지구 구석에 있는 한국이라는 나라의 마켓이 꽤나 쏠쏠하며 수익성이 높은 시장이라고 판단하기 시작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성난 사람들’은 미국 내 한인 사회를 겨냥해 만든 10부작 드라마라기보다는 미국에서 한국 시장과 한국 관객을 ‘직접’ 겨냥해 만든 일종의 ‘한국용 드라마’라는 점이다.
중산층으로 살아 남으려면 싸워 이겨라?
예전에는 이런 류의 작품이 바다를 건너오기까지는 배급과 유통이라는 바람과 파도를 뚫어야 했다. 지금은 디지털 콘텐트 유통 업체인 넷플릭스가 ‘한 방에’ 해결해 주고 있기 때문에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①미국에서 만들고 ②한국에서 인기를 모아 ③전세계 순위 톱으로 올리면 ④곧바로 세계 시장에서 큰 수익을 올리게 된다. ‘오징어 게임’이 톱 모델 케이스이다. 이제 미국 영화 콘텐트 업계의 창작자·제작자·투자자들은 한국 시장을 직접 겨냥하는 영화와 드라마를 만드는 일에 경쟁적으로 나서고 있다. ‘성난 사람들’은 A24가 만들어 넷플릭스 망에 탑재시킨 것이다. A24는 ‘미나리’의 제작사로 윤여정에게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안겨주기도 했다.
이처럼 미국과 한국의 시장이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분위기는 미국의 아카데미 시상식과 에미상 시상식이 선도하고 있다. 2020년 봉준호의 ‘기생충’이 아카데미 시상식을 흥분의 도가니로 만들자 2022년 에미상은 황동혁의 ‘오징어 게임’을 최고의 자리에 앉히며 분위기를 달구었고 다시 이번 2024년의 ‘성난 사람들’이 이뤄낸 성과는 셀린 송의 역작 ‘패스트 라이브즈’가 아카데미 작품상·각본상 후보로 올라가는 연결점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지난해 엄청난 인기를 모았던 장편 애니메이션 ‘엘리멘탈’의 감독은 역시 한국인 2세 피터 손으로, 아카데미 장편애니메이션상 부문에 올라 있다. 아카데미와 에미가 서로 주고받으며 결국은 시장의 최고 수익을 만들어 가는 분위기는 한동안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결국은 돈이다. 돈을 따라가면 이유가 보인다.
원제 ‘비프(beef)’는 ‘고기’라는 뜻이라기보다는 ‘불평’ ‘불만’ ‘싸움’의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다. 대니와 에이미 롸우의 싸움은 작은 불평에서 시작된다. 서로 모른 채 무시하고 제 갈 길을 갔으면 저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민자들은 (물질적으로) 잘살기 위해서 미국으로 갔지만 결국은 (올바르게) 잘사는 것의 문제에 직면한 자신들, 특히 2세대를 발견하고 당황해 한다. 이민 2세대는 이제 정체성 혼란 따위를 겪는 것이 아니라 미국인들처럼, 한국인들처럼, 그리고 전세계 누구들처럼 자본주의적 가치관에 대해 극심한 혼란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성난 사람들’은 소통과 연대라는 단어가 정치사회적으로 얼마나 허울 좋은 단어에 불과한 지를 보여주며, 다들 얼마나 지옥같은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지 그려낸다. 한때 자본주의는 노동자와 자본가가 싸우게 했지만, 어느 순간 더욱 더 못살게 된 하층계급과 아예 자본가 그룹에서 밀려난 중산층 계급의 싸움으로 바꿔냈다. 그러다 이제는 에이미와 대니처럼 그 싸움의 전선을 중산층 안으로 가두고 있음을 얘기하는 작품이다. 다들 중산층 정도는 되려고 안간힘을 다해 살아가고 있는데 그 범위가 너무 작아 경쟁이 치열한 바, 너희들끼리 알아서 치고 받고 싸워 이긴 자가 중산층으로 살아 남으라는, 그 정도는 돼야 사람처럼 살 수 있다는 의미처럼 보인다. 이러니 다들 성이 날 수밖에 없다. ‘성난 사람들’의 성과에 드리워진 빛과 그림자를 잘 구분해야 할 일이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ohdjin11@naver.com 연합뉴스·YTN에서 기자 생활을 했고 이후 영화주간지 ‘FILM2.0’ 창간, ‘씨네버스’ 편집장을 역임했다.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컨텐츠필름마켓 위원장을 지냈다. 『사랑은 혁명처럼 혁명은 영화처럼』 등 평론서와 에세이 『영화, 그곳에 가고 싶다』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