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에 놀러와" 평범한 2층 가정집의 반전, 이게 매장야? [비크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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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서울 용산구 한남동 주택가에 문을 연 프랑스 패션 브랜드 ‘르메르’의 플래그십 스토어(대표 매장)는 언뜻 매장이라기보다 집에 가깝다. 간살 디자인의 단정한 나무 대문 옆에 작게 쓰인 브랜드 이름은 마치 문패 같고, 계단을 올라 현관을 향할 때 보이는 작은 정원과 연못, 마당의 감나무는 여느 한국 주택의 모습 그 자체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 주택가에 문을 연 르메르 한남 플래그십 스토어. 프랑스 파리 플래그십에 이은 두 번째 플래그십 매장이다. 사진 삼성물산

서울 용산구 한남동 주택가에 문을 연 르메르 한남 플래그십 스토어. 프랑스 파리 플래그십에 이은 두 번째 플래그십 매장이다. 사진 삼성물산

현관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옷과 가방, 신발이 진열되어 있다는 점 외에는 구조나 분위기가 가정집과 비슷하다. 우선 보통 의류 매장에서는 시선을 빼앗길 수 있어 금기시하는 너른 창이 곳곳에 나 있어 자연광이 충분히 들어온다. 벽과 천장을 감싼 나무 몰딩과 한지로 된 벽, 누빔 천으로 만든 커튼은 영락없는 한국의 2층 양옥집이다.

1970년대 주택을 개조해 만든 르메르 한남 플래그십 스토어 전경. 사진 삼성물산

1970년대 주택을 개조해 만든 르메르 한남 플래그십 스토어 전경. 사진 삼성물산

지난해 12월 같은 한남동에 문을 연 패션 브랜드 ‘낫띵리튼’의 플래그십 스토어는 가정집을 개조한 2층 규모, 약 165㎡(50평) 남짓의 공간이다. 이곳 역시 매장이 아니라 누군가의 집에 들어선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의류 매장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계산대는 없고, 대신 예쁜 세면대와 욕조가 놓인 욕실이 커다랗게 자리한다. 의류 매장이면서도 옷과 가방은 마치 집처럼 옷장 등 일부 공간에 소량 진열된 것이 핵심. 대신 공간 곳곳에 편안한 소파와 테이블이 놓여있다. 상업 공간이면서도 인공조명은 낮추고, 햇살로 공간을 밝히는 것도 인상적이다.

국내 여성복 브랜드 '낫띵리튼'의 서울 용산구 한남동 쇼룸 전경. 의류 매장이면서도 의류는 2층 옷장 위주로 최소한만 진열해뒀다. 사진 낫띵리튼

국내 여성복 브랜드 '낫띵리튼'의 서울 용산구 한남동 쇼룸 전경. 의류 매장이면서도 의류는 2층 옷장 위주로 최소한만 진열해뒀다. 사진 낫띵리튼

위압감 주는 매장은 가라, ‘편안함’이 핵심  

“너희가 생각하는 주택은 어떤 모습이야?”
르메르의 한남동 쇼룸을 준비하기 위해 직접 한남동 일대를 돌며 공간을 물색했다는 크리스토퍼 르메르 아티스틱 디렉터가 르메르 한국 팀에게 했던 최초의 질문이라고 한다. 한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집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구현하려는 노력이 공간 곳곳에 베인 이유다.

르메르 한남 스토어는 주택과 부티크(매장)의 경계를 허문 공간이다. 위엄 있고 차가운, 그래서 범접하기 힘든 고가 브랜드 매장이 아니라, 누구나 쉽게 들어와 둘러보고 브랜드를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을 지향한다. 마당과 내부 매장 곳곳에 놓인 의자는 쇼핑하는 틈틈이 편안히 앉아 시간을 보내기 적당하다. 이곳의 공간 프로젝트를 담당했던 삼성물산 스토어 아이덴티티 그룹의 이정현 프로는 “르메르라는 브랜드를 완전하게 경험할 수 있는, 집처럼 편안한 공간을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며 “트렌드를 따라가는 것이 아닌 일상에 스며드는 옷을 만드는 르메르의 철학과 연결된 자연스러운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일상에 스며드는 편안함을 추구하는 르메르는 스토어 공간 곳곳에 의자를 두고 있다. 사진 삼성물산

일상에 스며드는 편안함을 추구하는 르메르는 스토어 공간 곳곳에 의자를 두고 있다. 사진 삼성물산

브랜드 철학 선명하게 보여준다

오프라인 쇼핑 공간의 문법이 달라지고 있다. 많은 물건을 가져다 놓고, 우선 많이 노출하는 전략보다 브랜드를 손으로 만지고 느끼며, 경험할 수 있도록 브랜드 세계관을 응축시켜 놓은 공간을 지향하는 추세다. 말 그대로 매장이 아니라 ‘브랜드의 집’인 셈이다.

지난해 11월 서울 신사동 도산공원 인근에 문을 연 패션 브랜드 ‘노아’의 플래그십 스토어는 아예 ‘시티하우스’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노아는 지난 2015년 시작된 뉴욕 기반의 하이엔드 스트리트 패션 브랜드다. 무신사 트레이딩과 정식 파트너십을 체결하고 미국·일본에 이은 세계 세 번째 진출국으로 한국을 낙점, 서울에 플래그십 스토어를 선보였다.

서울 신사동에 문을 연 노아 시티하우스 전경. 노아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편안하게 들러 브랜드를 경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구성했다. 사진 무신사

서울 신사동에 문을 연 노아 시티하우스 전경. 노아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편안하게 들러 브랜드를 경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구성했다. 사진 무신사

약 330㎡(100평) 2층 규모의 노아 시티하우스는 미국 대도시 인근 한적한 교외의 저택을 연상시킨다. 파라솔과 의자가 놓인 정원을 지나 현관으로 들어서면 왼쪽으로는 주방을 연상시키는 카페가, 오른쪽에는 의류가 놓인 응접실이 나타난다. 계산대 대신 큰 책상이 놓여있어 구매한 물건을 앉아서 계산할 수 있는 것도 노아 시티하우스만의 독특한 풍경. 나무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가면 노아의 의류와 액세서리 제품 사이사이로 빈티지 안경, 시계, 담요, 아트북 등 소품이 풍성하게 구성되어 있다. 천장까지 이어지는 개방감 넘치는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과 서울 시티하우스에서만 판매하는 서프보드는 브랜드 특유의 여유로운 감성을 반영한다.

미국 빈티지 가구와 소품, 의류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노아 시티하우스 내부. 계산대 대신 책상을 뒀다. 사진 무신사

미국 빈티지 가구와 소품, 의류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노아 시티하우스 내부. 계산대 대신 책상을 뒀다. 사진 무신사

매장에 흐르는 음악 하나까지도 노아의 색을 나타낼 수 있도록 했다는 무신사 트레이딩 관계자는 “단순히 옷을 판매하는 공간이 아니라 브랜드의 문화를 투영한 공간”이라며 “노아가 중요시하는 지역에 녹아드는 커뮤니티의 구심점이 되는 곳이자, 노아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편안하게 들러 호흡하고 즐길 수 있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패션에서 라이프 스타일로 확장

이런 집 형태의 매장들은 또한 라이프 스타일 브랜드로의 확장을 위한 전략적 공간이기도 하다. 실제로 낫띵리튼의 한남 쇼룸에서는 룸 슈즈와 배스가운, 수건 등 패브릭 상품, 우산과 파우치 등 생활 소품을 판매하고 있다. 모두 이곳에서만 구매할 수 있는 상품들이다.

의류 진열 공간 보다 응접실과 거실, 욕실 등에 더 많은 공간을 할애한 낫띵리튼. 이곳에서만 구매할 수 있는 배스 가운과 룸 슈즈 등 라이프 스타일 제품도 만나볼 수 있다. 유지연 기자

의류 진열 공간 보다 응접실과 거실, 욕실 등에 더 많은 공간을 할애한 낫띵리튼. 이곳에서만 구매할 수 있는 배스 가운과 룸 슈즈 등 라이프 스타일 제품도 만나볼 수 있다. 유지연 기자

쇼룸에 놓인 가구와 조명 등을 몇 년에 걸쳐 직접 수집했다는 이영주 낫띵리튼 대표는 “소품이나 홈 퍼니싱 제품, 모아왔던 클래식 가구도 추후 판매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며 “집 같은 쇼룸을 통해 라이프 스타일 브랜드로서의 확장 가능성도 모색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노아에도 서울 시티하우스에서만 판매하는 유리잔과 머그잔 등 라이프 스타일 상품이 있다. 커피와 주스 등의 음료를 내는 노아 카페에서 활용하는 기물들로, 이 상품을 구매하러 오는 팬들도 많다고 한다.

노아 시티하우스 1층에 자리한 노아 카페. 이곳에서만 구매할 수 있는 유리잔과 커피잔 등을 판매하고 있다. 사진 무신사

노아 시티하우스 1층에 자리한 노아 카페. 이곳에서만 구매할 수 있는 유리잔과 커피잔 등을 판매하고 있다. 사진 무신사

목적형 구매가 아니라 발견형(탐색형) 구매로 패션 소비 행태가 변화하고 있는 것도 브랜드 공간 구성이 변화하는 이유다. 옷이 필요해서 구매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 요즘, 구매 욕구를 자극하고 설득하는 데 매력적인 브랜드의 세계관은 필수요소가 됐다. 천편일률적인 백화점 매장 같은 사각의 공간이 아니라, 여유로운 공간에서 마음껏 브랜드의 세계를 펼쳐내는 곳. 요즘 브랜드가 집을 짓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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