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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덕노의 식탁 위 중국] 양귀비의 마지막 식사, 호떡

중앙일보

입력

양귀비가 죽기 전 마지막 먹었다는 음식 중 하나인 호떡.

양귀비가 죽기 전 마지막 먹었다는 음식 중 하나인 호떡.

많은 사람이 호떡은 중국에서 전해졌다고 생각하는 만큼 중국에도 당연히 호떡이 있다. 후삥(胡餠) 혹은 사오삥(燒餠)이라고 한다. 중국 호떡은 여러 종류가 있지만 대부분 흑설탕을 소로 넣어 기름에 담듯 지지는 우리 호떡과는 아주 다르다. 또 한국 호떡은 간식으로 먹지만 중국에서는 주로 식사로 많이 먹는다. 이렇듯 중국 호떡은 우리 상식과는 차이가 있고 역사 또한 만만치 않다. 다양한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먼저 양귀비가 죽기 전 마지막 먹었다는 음식 중 하나가 호떡이다. 서기 756년 안록산의 난으로 피난길에 오른 현종과 양귀비가 배고파하자 간신 양국충이 서둘러 시장에서 구해 온 음식이 호떡이다. 『자치통감』 등 역대 역사책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만 골라 엮은 『이십사사(二十四史) 통속연의』에 나온다.

부귀영화를 다 누렸던 양귀비의 마지막 식사가 비참했다 싶겠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당시 호떡은 황제 일행이 먹기에 전혀 손색없는 음식이었다.

일단 호떡은 뿌리부터 남다르다. 흔히 호떡의 원조를 중국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니다. 한자 이름처럼 호떡(胡餠)은 서역에 사는 호인(胡人)들의 떡으로 중앙아시아에서 전해진 음식이다. 그러니까 현재 아랍과 중앙아시아에서 먹는 난(naan)이라는 빵이 원조다.

호떡이 중원에 전해진 것은 기원전 2세기 한 무제 무렵이다. 명나라 말 『야항선』이라는 책에 김일(金日)이 처음 만들었다고 나오는데 흉노족 왕자 김일제(金日磾)의 오·탈자로 보인다. 한 무제가 흉노를 정벌하고 서역과의 교통로를 개척할 때 한나라에 귀화한 인물이다. 흉노 왕자가 전했으니 당시에는 서역에서도 상류층의 식품이었다.

실제 김일제가 전했는지 아닌지는 분명치 않지만 호떡이 한나라 때 전해진 것은 분명하다. 후한 때 한자 풀이 사전인 『석명(釋名)』에도 호떡이 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2000년 전 한나라 때 서역과의 실크로드가 열리면서 서역의 밀이 대량으로 중원에 전해질 때 밀가루 음식인 호떡 역시 함께 들어 온 것으로 본다.

실크로드 개척 이후 중원 상류층에는 긴 세월 동안 서역 바람, 호풍(胡風)이 불었다. 서역 음식인 호떡의 유행도 그중 하나다.

한나라 말의 영제는 무능하고 방탕한 황제였다. 내시인 환관들에 휘둘려 정치하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고 유비, 조조, 손권의 삼국시대가 시작되는 빌미를 제공했다.

이런 영제가 호떡 맛에 빠져 매일 호떡만 먹고 살았다. 『후한서』「오행지」에는 영제가 서역 풍속을 좋아해 서역 옷을 입고, 서역 음식을 먹으며 서역 음악과 춤에 빠져 지내니 황실 친척과 장안 귀인들이 모두 황제의 모습을 따랐다고 나온다.

중원에 분 호떡 열풍은 한나라를 거쳐 삼국시대와 위진 남북조를 지나 당나라로 계속 이어졌다. 『구당서』에도 현종 때 궁궐에서는 서역의 곡을 연주했고 귀인을 대접할 때 서역 음식을 차렸으며 귀족과 부녀자들 모두 서역 옷을 입는다고 했다. 한나라 말 이후 900년 동안 달라진 게 별로 없다.

현종과 양귀비도 호떡을 먹었지만 한 세기 후 장한가(長恨歌)를 지어 이들의 슬픈 사랑을 노래한 당나라 시인 백거이 역시 호떡을 좋아했다.

백거이가 『친구 양만주에게 호떡을 보낸다(寄胡餠與楊萬州)』라는 시를 썼는데 여기에도 호떡이 보인다.

참깨 호떡은 장안(長安) 풍으로 만든 것/ 화덕에서 갓 구워 바삭하게 익은 맛이 향기롭다/ 군침 흘리는 친구에게 보내니/ 고향에서 먹던 것과 비슷한지 맛보시게

장안 풍 호떡은 밀가루 반죽에 기름을 칠한 후 참깨를 박아 화덕에서 바삭하게 굽는 방식이라는데 당나라 수도인 장안에 그만큼 다양한 호떡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9세기 일본 승려 엔닌이 9년 동안 당나라에 머물며 쓴 『입당구법순례행기』에도 호떡이 보인다. 입춘을 맞아 황제가 절에다 호떡을 하사했다는 것이다.

호떡으로 대표되는 서역 문화, 호풍이 이렇게 널리 퍼졌다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적지 않다.

중화주의 영향 때문인지 흔히 서역을 문명이 낙후된 유목문화로 생각하지만 실크로드가 열린 이후 당나라 때까지 서역 문화는 중원보다 최소한 뒤처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1000년 세월 동안 중원에 서역 바람이 불었을 것이다.

참고로 우리 호떡도 알려진 것과는 다른 부분이 적지 않다. 보통 호떡을 임오군란 이후 화교가 한반도에 전했다고 하지만 실은 훨씬 이전에 들어왔다.

조선 초 『세종실록』에도 대마도 도주에게 호떡 두 상자를 선물로 보냈다는 내용을 비롯해 조선시대 문헌에 호떡 관련 기록이 다수 보인다. 다만 당시 기록에는 호떡(胡餠) 보다는 구운 떡인 소병(燒餠)이라고 했으니 지금의 호떡과는 다른 중앙아시아의 오리지널 난과 보다 가까웠을 것이다. 또한 당시 호떡은 우리나라에서는 귀했던 밀가루로 구운 음식이었으니 조선왕조실록에도 나오고 대마도 도주에게도 선물했을 만큼 상류층의 별미였다.

더차이나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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