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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정탁의 인문지리기행

그림자도 쉬어 가는 곳, 그곳에 서린 핏빛 권력 다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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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담양 식영정과 송강 정철의 기축옥사

김정탁 노장사상가

김정탁 노장사상가

한 동네에 명승이 세 곳 있으면 일동지삼승(一洞之三勝)이라 하는데 식영정·환벽당·소쇄원이 모여 있는 데가 그러하다. 행정상으론 식영정과 소쇄원은 담양이고, 환벽당은 광주에 속해 있지만 서로 가까이에 있다. 부근에는 면앙정·송강정·독수정 등 10여 개 정자가 널려 있어 여기는 예로부터 아름다운 풍광을 뽐내왔다. 뒤로는 송림이 울창하고 앞에는 창계천이 흐르고, 멀리에는 무등산이 위치해서다. 지금은 창계천에 댐을 쌓아 광주호가 생겨나서 예전 모습을 찾기 힘들지만, 수몰 전에는 창계천 계곡에 배롱나무가 많아 여름에는 붉은 꽃이 구름처럼 산에 뭉게뭉게 피어났다고 한다.

자연 속 신선놀이, 가사문학 산실
서인 송강, 동인을 사지로 몰아가

송강 자신도 거짓 상소로 유배행
당파 선명성 따지다 비참한 최후

식영정 인근엔 환벽당과 소쇄원
권력 등지고 물과 숲 품은 선비들

환벽당, 푸름이 고리를 두른 곳

전남 담양군 식영정. 방을 가운데 배치하는 일반 정자와 달리 한 쪽 귀퉁이에 방을 만들고, 앞면과 옆면에 마루를 깐 게 특이하다. [사진 김정탁, 남수, 중앙포토]

전남 담양군 식영정. 방을 가운데 배치하는 일반 정자와 달리 한 쪽 귀퉁이에 방을 만들고, 앞면과 옆면에 마루를 깐 게 특이하다. [사진 김정탁, 남수, 중앙포토]

식영정(息影亭)은 조선 명종 때 김성원(金成遠·1525~1597)이 세웠는데 그의 스승이자 장인인 임억령이 ‘그림자(影)를 쉬게 하는(息)’ 정자로 이름 지었다. 임억령은 을사사화의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에 환멸을 느낀 데다 아우 임백령마저 윤형원 일파인 소윤(小尹)의 일원으로 윤임 일파인 대윤(大尹)을 처단하는 데 앞장서자 아우와의 인연을 끊고 담양 부사를 끝으로 은퇴했다. 은퇴 후에는 식영정에서 8년간 은거하며 고경명·기대승·송순·정철에게 학문과 시를 가르쳤다. 김윤제·김인후·백광훈·송익필·양산보 등은 그를 흠모해 식영정에 드나들면서 아름다운 시문으로 화답해 이들과 함께 호남시학의 지평을 열었다.

식영정 아래에 흐르는 창계천과 광주호. [사진 김정탁, 남수, 중앙포토]

식영정 아래에 흐르는 창계천과 광주호. [사진 김정탁, 남수, 중앙포토]

환벽당(環碧堂)은 근처 충효마을에 살던 김윤제(金允悌)가 지었는데 식영정과는 불과 250m 떨어진 곳에 있다. 환벽은 ‘푸르름(碧)이 고리(環)를 두른다’라는 뜻인데 푸른 숲과 푸른 강으로 둘리어져 이런 이름이 생겨났다고 본다. 흥미로운 건 환벽당의 김윤제가 식영정의 김성원과 왕래하기 위해 창계천에 무지개다리를 놓았다고 하니 사뭇 노장다운 분위기를 연출했다고 본다. 한편 창계천 너머 지실마을에 살던 정철은 14세 때 환벽당 아래 낚시터인 조대(釣臺)에서 우연히 김윤제를 만나서 이 인연으로 27세 관직에 나갈 때까지 10여 년간 환벽당에 유숙했다.

맑고 산뜻한 정원, 소쇄원

식영정 바로 옆에 있는 서하당(오른쪽 건물). 왼쪽은 부용당이다. [사진 김정탁, 남수, 중앙포토]

식영정 바로 옆에 있는 서하당(오른쪽 건물). 왼쪽은 부용당이다. [사진 김정탁, 남수, 중앙포토]

소쇄원(瀟灑園)은 ‘맑고 깨끗하고 산뜻한’ 정원이란 뜻이다. ‘물 맑고 깊을 소(瀟)’와 ‘소탈할 쇄(灑)’는 사람 이름에나 가끔 쓰이지 일상에선 거의 쓰지 않는 단어인데 이를 사용해 정원 이름을 지은 게 특이하다. 이 정원은 인근 창암촌에 살던 양산보(梁山甫)가 기묘사화로 스승 조광조가 죽자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지은 별서(別墅) 정원이다. 조선시대 정원 중에 자연미와 구도 면에서 첫손에 꼽을 만큼 빼어나 여기도 노장다운 분위기가 짙다. 게다가 은둔을 위해 지은 건물인데도 풍광이 뛰어나 많은 문인이 방문해서 조선시대 원림(園林) 문화를 일구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그런데 식영정·환벽당·소쇄원 중에 어느 곳이 가장 노장다운 분위기를 자아낼까. 건축과 조경 차원은 몰라도 이름으론 ‘그림자를 쉬게 하는 정자’인 식영정이 으뜸이다. 또 식영정과 붙어 있다시피 한 서하당(棲霞堂)은 김성원이 자신의 호를 따 지은 집인데 ‘노을(霞)이 깃들다(棲)’라는 뜻이므로 여기도 우리들의 인문적 상상력을 자극한다. ‘식영’이 어째서 노장다운 분위기를 자아내는지는 『장자』의 외경오적(畏影惡迹), 즉 ‘그림자가 두렵고 발자국이 싫다’라는 내용을 접하면 금방 이해된다.

“그림자가 두렵고 발자국이 싫어 이것들을 떠나 멀리 달아나려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발이 움직일수록 발자국이 더 많아지고, 달릴수록 더 빨라져 그림자가 그의 몸을 떠나지 못했다.
그런데도 더디게 달려서라고 여겨 쉬지 않고 빨리 달리다가 마침내 힘이 떨어져서 죽었다.
그늘에 머물면 그림자가 사라지고, 조용히 머물면 발자국이 없어진다는 사실을 알지 못해서인데 그의 어리석음도 지나치다!”

욕망에 찌들었던 지난 흔적 지우기

식영정과 불과 250m 떨어진 환벽당. [사진 김정탁, 남수, 중앙포토]

식영정과 불과 250m 떨어진 환벽당. [사진 김정탁, 남수, 중앙포토]

임억령이 이 글을 접했을 때 욕망에 찌든 자신을 그림자로, 살아온 흔적을 발자국으로 여겼으리라. 그래서 욕망에 찌들고, 또 이 욕망을 위해 발품을 팔며 바삐 살아온 자신이 후회스러웠다. 늦게나마 이런 삶에서 벗어나고파 은퇴 후에 자신이 머물 곳을 ‘그림자를 쉬게 하는 정자’로 이름 지었다.

사람들은 식영정을 가리켜서 사선정(四仙亭)으로도 불렀다. 임억령·고경명·김성원·정철이 식영정의 ‘네 신선’이었는데 이들이 여기서 자연과 함께 시를 지으며 신선다운 삶을 즐겨서다. 또 신선처럼 살다 간 이들의 흔적은 『식영정이십영』에 잘 반영돼 있다. 이 책은 식영정 뒤 성산(星山)의 경치 좋은 곳 20곳을 택해 각자 20수씩 읊어서 총 80수의 영(詠)으로 구성된 책이다. 송강 정철이 지은 20영은 그 후 『성산별곡』의 밑바탕이 되었으니 식영정은 송강 문학의 산실인 셈이다.

정철은 식영정에서 문학의 꿈만 키운 게 아니다. 처세의 꿈도 함께 키웠는데 그 꿈은 기축옥사로 파탄이 났다. 기축옥사는 정여립이 모반했다는 고변으로 관련자가 천 명이나 죽은 사건이다. 이는 선조에 의해 저질러진 일이지만 정철의 의지도 분명히 작용했다. 정여립 사건이 일단락되는 시점에 이발이 정여립과 관련됐다는 양천회의 상소가 있었는데 이 상소를 정철이 사주해서다. 또 최영경을 길상봉이라 무고했던 양천경의 거짓 상소도 정철의 부탁으로 이뤄져서다. 양천회·양천경 형제는 소쇄원을 지은 양산보 손자라 정철과도 잘 통했다. 정여립 사건이 이들의 상소로 크게 확대됐으니 정철이 이 책임에서 벗어나긴 힘들다.

10살 아들마저 고문으로 잃은 이발

조선시대 원림(園林) 문화를 대표하는 소쇄원. [사진 김정탁, 남수, 중앙포토]

조선시대 원림(園林) 문화를 대표하는 소쇄원. [사진 김정탁, 남수, 중앙포토]

기축옥사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은 이발이다. 이발과 그 형제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이들의 어머니도 82세 고령인데 곤장을 맞다 죽었다. 또 이발의 아들은 10살 나이에 고문으로 숨졌다. 그의 조카들 대부분도 고문으로 숨져 나주에 살던 광산 이씨 가문은 풍비박산이 났다. 이발·이길 형제의 묘가 아무 연고가 없는 경기도 광명에 있는 건 이래서다. 이들이 비참하게 죽어 두려워서 아무도 오지 못하자 사돈 홍가신이 옷을 벗어 시신을 수습하고, ‘오리대감’ 이원익이 자신의 선산에 묘를 쓰도록 배려했다. 효령대군 후손으로 9대조부터 이발에 이르기까지 급제자를 계속 배출한 호남 제일 명문가의 말로가 이러했다.

정철은 어째서 이발 집안을 이렇게까지 도륙했을까. 이들은 호남을 대표하는 유자(儒子)의 지위를 놓고 심하게 경쟁했다. 게다가 속한 당파마저 달라 둘의 경쟁은 치열했다. 정철은 서인인데 강경 서인이었고, 이발도 강경 동인이었다. 당시 호남에선 동인 세와 서인 세가 병립했다. 나주에선 두 세력이 엇비슷했어도 나주를 중심으로 서남쪽인 영광·무안·해남·화순에선 동인 세가 강한 데 반해 동북쪽인 장성·광주·보성· 순천에선 서인 세가 강했다. 그런데 기축옥사를 계기로 이 균형이 깨져 호남 서인의 사랑방이었던 식영정은 그 후 더욱 주목을 받게 되었다.

지금 정치권에도 정철의 그림자

송강 정철

송강 정철

그런데 정철의 말로는 좋지 않았다. 양천경에게 거짓 상소를 하게 한 죄로 함경도 극변에 유배되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좌의정으로 복귀했어도 이내 선조의 미움을 사 관직에서 물러났다. 막판에는 생활도 곤궁해져 끼니 이을 식량이 없어 지인에게 끼니 부탁하는 편지도 써야 했다. 결국에는 가난과 실의 속에 강화도 외딴 곳에서 쓸쓸히 죽었는데 동인은 그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김우옹은 정철이 죽은 이듬해에 그를 탄핵해 관직을 박탈했고, 2년 후에는 정인홍의 참소로 부관참시도 당할 뻔했다. ‘동인 백정’이란 소리를 들을 정도로 기축옥사 때 구원(舊怨)이 이런 식으로 그에게 되돌아왔다.

정철의 삶은 이처럼 비참하게 끝났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는데 선명함만 따지다가 모든 걸 극단적으로 처리한 게 결정적이 아니었을까. 지금의 정치권도 이와 다르지 않아 정철과 같은 인물이 수두룩하다. 정철은 식영정에서 신선과 같은 삶을 즐겼는데 정치인으로서 왜 이렇게 모나게 행동했을까. 식영정에 은거했던 임억령이나 신선 놀이를 함께했던 동료들이 이런 정철을 보았다면 크게 안타까워했으리라.

김정탁 노장사상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