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 시민’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26일 취임 연설에서 가장 힘주어 말한 단어다. 한 장관은 연설문에서 “동료 시민들이 고통받는 걸 두고 보실 겁니까”라며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비판했고, “동료 시민에 대한 강한 책임감을 느끼기 때문”이라며 정치를 시작한 이유를 밝혔다. 그렇게 ‘동료 시민’은 한 위원장 연설문 곳곳에서 10차례 등장했다.
한 위원장은 ‘동료 시민’이란 표현을 사용한 것과 관련해 본지에 “재해를 당한 낯선 동료 시민에게 자기가 운영하는 찜질방을 내주는 자선, 지하철에서 행패 당하는 낯선 동료 시민을 위해 나서는 용기 같은 것들이 자유민주주의 사회를 완성하는 시민들의 동료 의식”이라고 설명했다. 대통령실도 ‘동료 시민’이란 표현에 주목했다. 한 대통령실 참모는 27일 “동료 시민은 개개인을 자유와 권리의 주체이자 연대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표현”이라며 “한 장관이 언급한 선민후사(先民後私)와 함께 신선하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동료 시민(fellow citizen)’은 서구 민주주의 역사에서 관습화된 용어다. 미국 대통령의 연설문도 통상 fellow citizen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한국 정치에선 자주 등장하지 않는 단어였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 시민 대신 국민이란 용어만을 사용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국민의힘의 한 초선 의원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썼던 ‘깨시민(깨어있는 시민)’이란 표현 때문인지, 시민은 진보 진영의 단어로 여겨진 측면도 있었다”고 했다.
국내 정치에서 ‘동료 시민’이란 표현의 중요성을 공론화한 인물은 정치학자인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다. 박 대표는 진보 정치학계의 대부로 불리는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의 제자다. 10여년전부터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 주권을 강조하며 ‘국민’이 아닌 ‘동료 시민’이란 표현이 더 자주 사용돼야 한다고 꾸준히 주장해왔다.
그는 2011년 저서 『정치의 발견』에서 “유권자를 동료 시민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만이 민주주의 가치에 상응하는 정치가가 될 수 있다”고 밝혔고, 2014년 ‘국민보다 동료 시민’이란 제목의 경향신문 칼럼에선 “민주주의란 시민권에 기초를 둔 체제로 정의된다”며 “민주주의는 동료 시민이란 표현이 자연스러울 때 확고한 정치문화가 된다”고 강조했다. 그 뒤에도 박 대표의 각종 언론 기고문과 인터뷰엔 ‘동료 시민’이란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박 대표는 ‘동료 시민’ 외에도 다양한 정치적 현상을 개념화하며 언론과 정치권의 주목을 받았다. 2018년 출간한 『청와대 정부』로 박근혜 정부와 문재인 정부의 청와대 쏠림 현상을 비판했고, 올해 8월 낸 『혐오하는 민주주의』를 통해선 친박과 친문에서 시작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개딸'과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의 '이대남' 현상으로 이어진 팬덤 민주주의의 문제점을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