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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배고픔의 절벽에 내몰린 지구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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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윤선희 유엔 세계식량계획 한국사무소장

윤선희 유엔 세계식량계획 한국사무소장

지난 8월과 10월에 아프리카 케냐의 유엔 세계식량계획(WFP) 식량 지원 현장을 방문했다. 수혜자의 신원을 홍채로 확인하고, 식량은 디지털 계량기로 양을 정확하게 맞춰 나눠주고 있었다. 동행한 한국대표단이 감탄할 정도로 정확하고 철저했다. 부모를 잃고 열 명의 동생을 챙겨야 하는 큰형, 남편을 잃고 여섯 명의 자식과 조카를 돌보는 엄마 등 약 20만 명이 그렇게 WFP의 지원에 의존해 배고픔을 달래고 있었다. 난민 엄마는 “우리를 도와주는 한국을 위해 매일 기도한다”며 울먹였다.

안도감과 자긍심도 잠시 현지 직원의 안내를 따라 저수지와 과수원을 방문하면서 안타까움이 몰려왔다. 한국의 주말 텃밭에서 흔히 보는 햇빛 가림막과 평범한 저수지가 현지인에게는 혁신이고 스마트농업이었다. 한국을 비롯한 선진국이 이들에게 관심과 지원을 조금 더 보낸다면 배고픔을 크게 줄일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분쟁·재난 느는데 지원은 급감
세계식량계획 사업 50% 줄어
한국이 앞장서 희망 보여주길

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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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의 상념이 다시 떠오르는 것은 배고픔을 겪는 나라들이 올해 우리의 관심에서 더 멀어졌기 때문이다. 지난해까지 전 세계 식량 위기는 모두의 문제였다. 분쟁과 기후 위기에다 코로나19까지 겹치면서 불경기와 물가 폭등이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가릴 것 없이 발생하자 식량 부족 문제 해결에 국제사회가 나섰다. 202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WFP는 1963년 활동 시작 이후 60년 넘는 역사에서 지난해 가장 많은 지원(140억 달러)을 받았고, 가장 많은 수혜자(1억5800만 명)를 도와줬다. 한국도 WFP 연간 공여 규모 상위 10위권 국가로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올해 사정은 다르다. 팬데믹이 꺾이고 각국 정부는 허리띠를 졸라맸다. 분쟁과 자연재난은 줄기는커녕 더 늘었다. 지난해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이어 지난 10월 하마스의 이스라엘 기습 공격이 발생했다. 집과 마을을 집어삼킨 큰 홍수는 지난해 파키스탄에 이어 올해 리비아를 덮쳤다. 지진은 아프가니스탄을 2년 연속 강타했고, 올해엔 튀르키예와 모로코·네팔을 흔들었다. 모두 WFP가 활동하는 배고픈 지역들이다.

반면 전 세계에서 보내오는 후원금으로만 식량 및 개발 지원이 가능한 WFP는 역대급 자금 위기에 직면했다. 올 초 WFP는 1억7150만 명에게 정량의 도움을 주기 위해 251억 달러의 예산이 필요할 것으로 내다봤는데, 연말까지 40%도 받기 어려울 것으로 우려된다. 다시 말하면 WFP의 식량 지원이 더 절실한 1억7150만 명 중 절반도 도움을 받기 어려워졌다는 의미다.

전례 없는 자금난에 WFP는 전체 사업 지역 중 절반에서 지원을 줄여야 하는 실정이다. 식량이나 현금, 영양 보충 프로그램이 축소 대상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WFP는 지원 대상을 1000만 명 줄였다. 최근 분쟁이 발생한 팔레스타인에서는 20만 명에 대한 지원을 이미 지난 6월 중단했다. 인구 3분의 2가 극심한 식량 위기를 겪는 남수단에서 WFP는 지원 대상을 줄이고 양도 절반으로 줄여야만 한다. 아이티에서도 식량이 가장 시급한 10만 명이 WFP의 긴급 구호 음식을 받지 못하게 됐다. 아시아·중동·아프리카·남아메리카 가릴 것 없이 지난 11개월 동안 배고픔의 절벽에 몰렸다.

WFP는 지금보다 지원이 1% 줄어들 때마다 40만 명이 더 심각한 배고픔에 노출되는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외부의 지원이 현재의 절반 수준으로 줄어들면 2300만 명이 추가로 식량 위기를 겪을 수밖에 없어 안타깝다. 지난 10월 한국을 방문한 WFP 아프가니스탄 사무소장은 “자금 부족으로 지원 대상에서 제외된 WFP 수혜자에게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슬프고 어려운 일”이라고 고백했다.

현지인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나큰 식량 위기 앞에서 한국이 앞장서서 희망을 보여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한국은 이미 60년 전 WFP를 비롯한 국제사회의 도움으로 식량 위기를 한 세대 만에 극복했다. 이제는 전 세계 곳곳에서 긴급 구호와 지역사회 개발을 돕는 빛나는 모범사례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도 구할 수 없다. 이제는 우리가 인도주의 정신을 발휘해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할 때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윤선희 유엔 세계식량계획 한국사무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