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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 칼럼] 결국 김기현 체제 유지 위한 시간끌기였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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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7호 31면

이정민 칼럼니스트

이정민 칼럼니스트

“대통령과 하루에 3~4번씩 통화한다”는 국민의힘 김기현 대표 발언에 눈살을 찌푸린 게 나만은 아닌 모양이다. ‘윤심(尹心) 팔이’란 공격이 사방에서 쏟아지고 있으니 말이다. 대통령과 여당 대표가 긴밀히 소통하는 거야 나무랄 일이 아니다. 하지만 대통령과의 대화는 비밀에 부치는 게 불문율이다. 국정 최고 책임자와 집권당 수뇌부의 접촉 사실이 드러나면 대화의 내용을 떠나 쓸데없는 억측을 부를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선 일을 그르치는 화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역대 어느 정권을 막론하고 공식 일정이 아니면, 당사자는 물론 측근이나 실세들조차 ‘모르쇠’로 함구하는 게 오랜 관행이었다.

험지 출마 권고에 ‘윤심 팔이’로 대응
‘관광버스 92대’ 장제원과 도긴개긴
친윤·영남 기득권, 중원 확장 걸림돌
DJ, 일등공신 불출마로 신당 물꼬 터

선데이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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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정부부터 역대 정권의 집권당 출입기자로 취재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게 대통령이 누굴 만나, 무슨 대화를 했는지 취재하는 거였다. 뻔히 알고 묻는데도 속 시원히 “그렇다”고 확인해 주는 참모나 당직자가 없어 애를 먹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4선의 중진인 김 대표가 이런 이치를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대통령과) 밤 9시, 10시에도 만나 이야기 나눈다” “주제를 가지고 하는 게 아니라 그냥 프리토킹한다” “어떤 때는 만나면 3시간씩도 이야기한다”고 말했다. 그것도 기자들과 수백 명의 지역구민 앞에서 말이다. 상식적이지 않고 자연스럽지도 않다.

속이 타들어 가는 그의 심경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자신이 임명한 ‘인요한 혁신위’로부터 느닷없이 ‘험지 출마 권고’의 일격을 당했다. 혁신위가 ‘조기 해산’이란 배수진을 치고 압박해 오는 바람에 운신의 폭도 좁아졌다. 정치 생명을 건 결단을 강요받으며 쫓기는 신세가 된 것이다. 충격과 당혹감을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아무리 다급해도 대통령을 방패막이 삼는 모습은 구차하고 좀스럽다. 남에겐 “윤심 팔지 말라”고 경고해 놓고 자신은 대통령 운운하고 있으니 집권당 대표의 체면도 말이 아니게 됐다. 장제원 의원의 ‘관광버스 92대 시위’와 도긴개긴이다. 더 치명적인 건 ‘김장(김기현-장제원) 연대’로 당권을 잡은 ‘김기현 체제’가 결국 영남 기득권의 산물이자 친윤의 아성이라는 이미지만 더 각인시켰다는 점이다. 물론 정치 초보인 인 위원장의 성급하고 거친 일방통행식 제안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지만, 적지 않은 국민이 혁신위 권고안에 기대를 품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혁신위 안이 물거품이 됨으로써 “혁신위는 김기현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시간끌기용”(김경진 혁신위원)이었다는 의심만 확인시켜 준 셈이 됐다. 안 하느니만 못한 꼴이 된 혁신위 해프닝은 국민의힘의 내년 총선 가도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 영남당 이미지를 털어 내고 중원으로 세를 확장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친윤(親尹) 기득권임이 확연해졌다. 진열된 상품은 그대로 둔 채 가게의 외관만 바꾼다고 손님이 들지 않는 것처럼 내적 혁신 없는 외연 확대는 불가능하다.

김기현 체제를 만든 건 윤 대통령 자신이다. 낮은 인지도로 고전하던 김 대표를 ‘원조 윤핵관’ 장제원 의원이 올려세웠고, 윤 대통령도 김 대표와 두 차례나 만찬을 하며 ‘후원자’를 자처했다. 여론조사 없는 당원 100% 투표로 경선 룰을 바꿔 무리수를 뒀고, 유승민· 나경원 전 의원 등 경쟁자들에 대한 조직적 거세 작전을 폈다. 의지할 곳 없이 혈혈단신 정치에 들어온 윤 대통령으로선 자파 세력 구축의 교두보를 마련했다고 안심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국민의 눈높이와는 거리가 있다는 게 여론조사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한국갤럽 조사(11월 21~23일)에 따르면 김기현 대표가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다’는 답변은 26%, ‘그렇지 않다’는 부정적 응답은 61%였다.  ‘역대 최약체’란 평을 듣는 김기현 체제를 친윤들이 떠받치며 기득권 유지를 위한 진지전(陣地戰)에 돌입하는 모양새다.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당 지도부가 혁신위의 요구를 거부하고, 인 위원장의 공천관리위원장 인선 제의마저 거절하면서 ‘인요한 혁신위’는 사실상 도중하차로 막을 내리게 됐다. 지도체제를 둘러싼 분란이 다시 불거질 참이다. 그러나 혁신위든, 비대위든 기득권을 내려놓겠다는 선당후사(先黨後私) 정신 없이는 백약이 무효가 될 터다. 노른자위 알맹이는 자신들이 독차지하고 험지 출마자를 찾는 외연 확장이라면 누가 응하겠는가. 경쟁력 갖춘 신인의 수혈 대신 정치 낭인과 브로커만 설치는 야바위판이 될 게 뻔하다.

김대중(DJ) 대통령의 결단은 현 여권이 되짚어 볼 사례가 될 만하다. 집권 3년 차에 총선(2000년)을 맞은 DJ는 전문가, 청년, 여성 등 정치 신인을 대거 영입하고 신당(새천년민주당)을 창당했다. 이에 앞서 DJ는 먼저 ‘대통령 만들기’의 일등공신인 동교동계와 호남 의원들의 불출마를 유도하는 것으로 외연확장의 물꼬를 텄다. 동교동계 좌장이자 평생 DJ를 따랐던 권노갑 고문 등 중진과 호남 의원들이 기득권 포기를 선언하고 불출마했다. 호남당 이미지를 벗고 ‘젊은 피’ 수혈을 위한 선당후사 정신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그 결과 제1당은 놓쳤지만 과반 정당 없는 제2당(한나라당 133, 민주당 115, 자민련 17석)으로 정권 말 안정적으로 권력 관리를 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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