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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소연의 시인이 사랑한 단어

유희경, ‘걱정’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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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소연 시인

김소연 시인

낯선 도시의 낯선 골목을 혼자 걸어가다가 핸드폰이 방전되어버렸다. 지도 어플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더라도 상관없다 싶었다. 걷다가 적당한 곳에서 택시를 잡아타면 그만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잠시 후 생각이 바뀌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연락을 취하다 걱정을 시작하게 될까 걱정이 되었다. 나는 걱정되는 사람이 될 생각은 없어서, 가까운 편의점에 들어가 핸드폰 충전을 완료하게 되었다.

유희경 시인은 어느 시집의 추천사에서 ‘걱정’을 “인간의 본심”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입김 날리는 겨울 한밤. 고양이가 애옹애옹 울 때 주위를 두리번거리게 되는 착한 마음.’ 인간의 선의가 걱정에서 비롯된다면, 걱정이 많은 사람은 선의가 넘쳐흐르는 사람일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왜냐하면 인간은 대부분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줄기찬 걱정을 일삼을 뿐, 타자를 향한 걱정을 할 겨를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시는 우리 뒤편에 산적해 있는 걱정할 것들을 들추어 보여주는 역할을 도맡는다. 인간의 본심, 우리의 착한 마음이 사그라지지 못하도록 재촉해보는 것이다.

시인이 사랑한 단어

시인이 사랑한 단어

유희경의 『겨울밤 토끼 걱정』은 이야기로 기획된 시집이다. 이야기라는 것은 주로 기억과 연루되고, 기억은 주로 과거에서 비롯된다. 시인의 걱정하는 마음이 과거로 흘러 들어간다. 걱정이 미래가 아니라 과거로 향할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이 시집을 통해서 새삼스레 배웠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라며 시작되는 걱정. ‘이제 와 생각해보면’ 하며 펼쳐지는 걱정.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로 귀결되는 걱정…….

이야기는 폭설 속을 건너온 외투처럼 양어깨에 흰 눈 같은 걱정을 잔뜩 얹고서 우리 앞에 당도한다. 눈을 털고, 젖은 외투를 벗고, 난로 앞에서 잠시 온기를 쬐는 시간. 그 시간은 유희경의 시가 탄생하는 시간이다. 착한 마음이 난로 앞에 서서 잠시 우리를 등지고 서 있는 시간이다.

김소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