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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조민근의 시선

‘소마불사’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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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조민근 기자 중앙일보 경제산업디렉터
조민근 경제산업디렉터

조민근 경제산업디렉터

요즘 은행들은 금융당국이 낸 문제를 푸느라 끙끙대고 있다. 이른바 ‘상생금융’ 숙제다. 지난 20일 김주현 금융위원장과 이복현 금감원장은 금융지주사 회장들을 모아놓고 자영업자와 소상공인들의 부담을 ‘직접적으로, 체감할 수 있도록’ 낮춰달라고 했다. ‘자발적 상생안’을 요청한 것이라곤 했지만 사실상 특정 계층에 이자를 깎아주라고 요구한 셈이다. 이도 모자랐는지 27일에는 은행장들을 소집했다.

요구가 너무나 노골적이라 금융당국도 나름대로 근거는 있겠거니 싶었다. 예컨대 자영업자들에 물리는 금리가 다른 대출에 비해 불합리하게 높다는 증거, 아니 단서라도 말이다. 그런데 그런 건 없다. 단지 여론이 나쁘기 때문이란다. 김주현 위원장은 “막대한 은행 이익이 금리 상승 등 외부 환경 변화에 따른 결과라는 따가운 시선이 있다”고 했고, 이복현 원장은 “횡재세 논의까지 거론될 정도로 여론이 나빠진 상황”이라고 했다. 어쨌든 은행은 돈을 벌고 있고, 자영업자들이 가장 힘들다고 하니 횡재세 맞기 전에 여론을 달래보라는 얘기다.

‘개미’ 원성에 공매도 금지 이어
자영업자 특정해 금리인하 압박
‘머릿수’ 노린 선심성 정책 유감

결국 은행권이 내놓을 답안이 정답인지 아닌지도 여론의 반응에 달린 셈이다. 아마도 최대한 범위를 넓히는 게 안전할 것이다. 문제는 자영업자만 500만 명이 넘는 데다, 저마다 형편도 제각각이란 것이다. 골목식당을 운영하는 영세업자가 있는가 하면, 빌딩 몇 채를 들고 있는 준재벌급도 있다. 하지만 어떤 기준을 세우더라도 논란에 시달릴 게 뻔하다. 그렇다고 일괄적으로 낮추기도 어렵다. 배당이 크게 줄게 된 주주들의 반발과 소송 가능성은 나중 문제라 치자. 당장 이자 부담에서 사정이 나을 게 없는 영끌족 직장인들이라고 가만있겠는가.

자영업 대출은 코로나가 유행하던 시기부터 크게 늘었다. 정부가 대출 확대와 만기 연장을 독려하면서다. 부실 비상등도 이미 켜진 상태다. 여러 곳에서 돈을 빌린 다중 채무자만 따져도 177만 명, 이들이 빌린 대출 잔액은 744조원으로 역대 최대다. 연체된 대출도 1년 전 5조2000억원에서 13조2000억원으로 급증했다. 고금리 장기화가 예고된 상황이니 더는 부실이 커지는 것을 막고 한계에 다다른 자영업자에는 채무 조정으로 출구를 열어줘야 할 타이밍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이자감면 카드를 꺼내 들었다. 사실상 대출을 더 얻어 쓰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한때 한국 경제에는 ‘대마불사(大馬不死)’란 말이 유행했다. 기업의 도산이 불가피하지만, 덩치가 너무 클 경우 파장을 우려해 구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일컫는 얘기다. ‘너무 커서 망하게 하기 어렵다’(too big to fail) 는 현실론이다. 금융당국은 이를 구실 삼아 구조조정을 미루는 경우가 잦았고, 결국 금융위기와 외환위기로 가는 실마리를 제공했다. 그런데 요즘 당국은 덩치보다 머릿수에 신경을 쓰는 것 같다. ‘너무 많아 망하게 하기 어렵다’(too many to fail)라는 또 다른 현실론이 관가를 배회하고 있는 것이다. 대마불사의 변형인 ‘소마(小馬) 불사’, 혹은 ‘다마(多馬) 불사’론으로 일컬을 만하다.

 약자인 자영업자를 돕자는 것이니 ‘대마불사’와 비교는 어불성설이라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대마’든 ‘소마’든 불사의 존재는 바람직하지 않다. 좀비 기업이 정부 지원을 받아 억지로 시장에 머무르면 정상적 기업들도 생존하기 어려운 환경이 된다. 곳곳에 도덕적 해이가 싹트고, 자원은 생산적이고 혁신적인 곳으로 흘러가지 못한다. 현재 한국의 자영업 상황도 마찬가지다. 한 집 건너 카페, 한 집 건너 치킨집인 상황에서 대출을 아무리 늘려본들 이자 내면 남는 게 없는 ‘종노릇’을 면하긴 어렵다. 전체 취업자 중 자영업자 비율은 여전히 20%에 달해 미국(6.6%)·일본(9.8%) 등과 견주면 한참 높다.

경제 정책에 합리성보다 머릿수의 논리가 적용된 사례는 최근 또 있었다. 공매도 금지다. 글로벌 투자은행(IB)들의 불법행위가 있었다지만 제도 운용을 완전히 중단할 정도인가에 대해선 많은 전문가가 고개를 갸웃한다. 당초 금융위원장조차 난색을 보일 정도로 후환이 우려되는 조치였으니 말이다. 현재 개인투자자는 1400만 명에 달하고, 이들의 증시 거래 비중은 64%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자영업자, 개인투자자 과잉’은 우리 경제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단면이기도 하다. 근본 해법은 기업 키워 좋은 일자리 늘리고, 자본시장을 키워 안정적인 소득을 얻을 수 있게 하는 일이다. 그 대신 당장의 고통을 피하고 눈앞의 이익을 취하려다 소탐대실(小貪大失)하는 우를 범하진 말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