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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선2035

도파민 중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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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성지원 기자 중앙일보 기자
성지원 정치부 기자

성지원 정치부 기자

“의원님 휴대폰을 뺏어야 돼요.”

어떤 보좌관이 이렇게 토로했다. 보좌하는 의원이 하루에도 몇 시간씩 유튜브와 SNS를 들여다보는 휴대폰 중독이란다. 가끔 ‘새벽감성’으로 감성글을 SNS에 올리기라도 하면 의원실은 비상이다.

이젠 이런 장면이 낯설지 않다. 지난 7월 더불어민주당이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철회를 촉구하며 국회에서 철야농성을 벌일 때 기자들 눈에 띈 건 의원들의 결기보다 농성장에 앉아있는 내내 휴대폰을 보는 이재명 대표였다. 이 대표는 성남시장 시절 SNS 중독을 스스로 인정했다. 짧고 굵직한 SNS 소통은 ‘사이다’의 원천이기도 했다.

최강욱 전 더불어 민주당 의원이 최근 한 출판기념회에서 ‘여성비하’ 발언 논란에 휩싸이자 지난 21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 [최강욱 전 의원 페이스북 캡처]

최강욱 전 더불어 민주당 의원이 최근 한 출판기념회에서 ‘여성비하’ 발언 논란에 휩싸이자 지난 21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 [최강욱 전 의원 페이스북 캡처]

리그오브레전드(LOL)의 살아있는 전설 페이커도 최근 중독을 고백했다. 페이커는 19일 롤드컵 우승 후 기자회견에서 동기부여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한마디를 묻자 대뜸 “요즘 유튜브나 틱톡이 너무 중독성이 강해서 많은 분이 그런 거로 고생할 것 같다. 저도 이제 많이 끊고 노력할 테니 함께 화이팅하자”고 했다. 그래서 많이 끊었을까? “페이커도 못 참는데 내가 어떻게 참느냐”는 반응이 대다수다.

도파민에 정처 없이 노출된 시대, 중독엔 국회의원도 프로게이머도 없다. 영화나 드라마는 한 줄 요약이, 구구절절 설명보단 사이다 발언이 각광받는다. 기자로선 품 들인 취재, 공들여 쓴 기사가 무색할 때가 있다. 25일 사내 통계로 확인한 오늘 가장 많이 읽힌 기사의 총소비시간은 37초. 대선 때 여야 후보가 ‘여성가족부 폐지’(윤석열 후보), ‘부자감세 반대’(이재명 후보) 등 한 줄 공약만 열심히 내세운 이유가 있다.

트렌드라지만 가끔은 글과 영상의 길이만큼 생각마저 요약될까 두렵다. 1분 내외 짧은 영상인 숏폼에 30분만 노출돼도 사고력과 기억력을 담당하는 전두엽이 잠깐 마비된다고 한다.

한국리서치 여론조사에서 숏폼 콘텐트 이용자 63%가 숏폼의 문제점으로 ‘전체 맥락보다 결과에만 집중돼 있다’는 점을 꼽았다. 최근 민주당은 SNS 게시물 1000건을 만점으로 하는 디지털·언론 소통실적을 선출직 공직자 평가 기준으로 내세웠는데, 당내에선 “생각 없는 ‘아무 말’이라도 개수만 채우면 되느냐”는 불만이 나왔다. 최근 몇 정치인의 화끈한 SNS ‘아무 말’을 보자니 합당한 문제 제기다.

짧은 게 미덕인 시대에도 이런 소식도 있다. 내년 아카데미 작품상 유력 후보작인 ‘오펜하이머’와 ‘플라워 킬링 문’ 두 편의 영화는 모두 3시간 넘는 장편이다. ‘플라워 킬링 문’의 감독 마틴 스코세이지는 최근 인터뷰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전개 방식을 취하기 위해서는 이 정도 러닝타임은 필요했다”고 말했다. 대사 없는 장면, 쉼표와 마침표가 모두 이야기를 담고 있단 얘기다. 장광설도 때론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