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최종학의 경영산책

스스로 판단하라는 IFRS, 중견·중소 기업에 스트레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3면

최종학 서울대 경영학부 교수

최종학 서울대 경영학부 교수

지난 몇 년간 회계감사에 대한 기업들의 반발이 심하다. 올바른 회계처리가 무엇인지를 두고 기업과 회계법인 또는 회계법인들끼리 다투는 경우도 있었다. 금융당국이 회계처리가 잘못되었다고 징계를 내리자 기업, 회계사, 그리고 학계에서 함께 반발하기도 했다. 필자는 이런 혼란이 생긴 가장 중요한 이유가 회계기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왜 그런지 알아보자.

우리나라는 독자적인 회계기준(K-GAAP)을 사용했지만, 국제적 추세에 발맞추어 2011년부터 상장기업은 국제회계기준(IFRS)을 사용한다. 하지만 비상장기업은 K-GAAP을 여전히 사용한다. K-GAAP에서는 상대적으로 측정하기 쉬운 취득원가를 기준으로 회계처리를 한다. 따라서 측정을 달리할 여지가 많지 않으므로 논란이 발생할 가능성이 작다.

공정가치 장부 기록하는 IFRS
처리방법 복잡해 비용 등 부담
코스닥 상장 소형 기업들에겐
국제-한국 기준 중 선택권 줘야

회계 보수 크게 늘며 불만도 커져

경영산책

경영산책

그에 반해 IFRS는 공정가치(公定價値)를 회계장부에 기록하자는 철학에 따라 만들어진 기준이다. 그런데 공정가치를 어떻게 측정할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대부분의 기업, 특히 중견·중소기업은 보유하고 있는 복잡한 구조의 자산·부채에 대한 공정가치 평가를 직접 수행할 능력이 부족하다. 그러므로 외부 평가기관에 업무를 위탁하는데, 그 건수가 상당하기 때문에 평가보수가 감사보수보다 많은 경우도 종종 있다.

또한 K-GAAP을 사용할 때보다 회계처리가 복잡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중견·중소기업에는 회계전문성을 가진 직원이 없다. 따라서 과거에는 직접 수행하던 기중(期中) 회계처리조차 IFRS 도입 이후엔 외부에 위탁한다. 회계처리가 어려우니 감사에도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따라서 감사보수도 증가했다. 그래서 회계에 대한 불만이 폭증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IFRS에는 ‘거래의 경제적 실질’을 판단해 회계 처리해야 하는 부분이 많다. IFRS는 자세한 가이드라인 없이 판단의 근거가 되는 큰 틀만 제공하는 경우가 많은데, 스스로 판단해서 합리적인 회계처리를 하고 왜 그렇게 판단했는지 이유를 공시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금융당국이 기업의 판단이 잘못됐다고 사후에 처벌하는 일이 다수 발생했다. 이런 일이 벌어지니 기업이나 회계법인 모두 애매한 사안에 관해 판단을 직접 내리는 것을 회피하게 됐다. 그 결과 기업이나 회계법인에서 한국회계기준원(KAI)이나 한국공인회계사회(KICPA)에 올바른 회계처리가 무엇인지 판단해달라고 질의하는 경우가 크게 증가했다.

더 놀라운 것은 다른 회계법인에 컨설팅을 요청하는 숫자도 급증했다는 점이다. 감사인이 모르겠다고 하니 다른 회계법인에 요청하게 된 것이다. 즉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남에게 의사결정을 떠넘기는 것이다. 이러다 보니 시간이 오래 걸리고 비용도 증가하면서 갈등이 심해지게 된 듯하다.

IFRS의 적용 범위 다소 좁혀야

글로벌 시장에서 활동하는 대기업은 당연히 IFRS를 사용해야 한다. 이들은 이럴 능력도 있으며, 회계 관련 평가나 컨설팅 비용도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다. IFRS 도입으로 전 세계가 동일한 회계기준을 사용하게 됨에 따라 비용이 절감되는 장점도 생겼다. 그러나 국내 시장에서만 활동하고 외국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경우도 거의 없는 중견·중소기업은 이런 장점도 거의 없으면서 혼란만 겪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IFRS 사용을 중지하고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미국과 일본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가 IFRS를 사용하고 있다. 두 나라야 강대국이니 독자 회계기준을 사용할 수 있지만, 한국이 독자 기준을 사용한다면 다른 나라에서 못 믿겠다고 할 것이 뻔하다. 따라서 필자는 이 문제점 해결을 위해서 IFRS의 적용 범위를 약간 좁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코스닥에 새로 상장하는 작은 기업만이라도 IFRS와 K-GAAP 중 선택하도록 했으면 한다. 자신들의 능력에 맞는 기준을 사용할 수 있다면 이들은 대부분 K-GAAP을 택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지금처럼 비용이 부담되고 회계처리가 힘들다고 집단으로 저항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일정 규모 이상 커진 이후에 IFRS를 사용하도록 하면 된다.

미국도 외국 상장기업이 미국에서 공모가 아닌 사모로 주식을 발행한 경우 IFRS 사용을 허용한다. 일본은 자국 기업에 대해서도 IFRS나 미국 기준 사용을 허용한다. 만약 이랬을 때 기업 간 비교 가능성이 문제가 된다면, 한때 미국에서 시행한 것처럼 주석으로 차이를 설명하도록 하면 된다. 그리고 IFRS를 바탕으로 하지만 공정가치나 지배력 평가 등 어려운 부분만 쉽고 명확하게 고치는 방식으로 K-GAAP을 개정한다면 비교 가능성 문제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고의·중대 위반 아니면 처벌 말아야

감독 당국도 감독하는 방식을 바꿔야 한다. 전문가들도 판단이 다를 수 있는 애매한 사항을 회계처리가 틀렸다고 처벌하는 일이 가끔 발생한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런 현상에 대해 공무원들의 실적 쌓기 목적 또는 정치적 이유로 처벌이 남용된다고 비판하고 있다. 고의 분식회계 혹은 중대한 회계 오류가 아니면 선진국처럼 전향적으로 수정하도록 하고 처벌은 생략하는 것이 필요하다. 금융당국도 앞으로 이런 방향으로 가겠다는 내용이 포함된 ‘회계감독 선진화 방안’을 발표한 바 있으니 이를 꼭 지켜주기 바란다.

기업도 회계 인프라 향상을 위한 투자를 해야 한다. 감사인이 기업을 위해 회계 의사 결정을 내리고 회계처리를 대신 해주는 것은 불법이다. 따라서 기업 스스로 회계처리를 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전문인력을 채용하든지 양성해야 한다. 선진국 기업은 당연히 그렇게 한다. 남들만 비난하기 전에 기업 스스로 문제점을 먼저 고쳐야 한다.

· K-GAAP: 한국회계기준. 우리나라 비상장 기업들이 채택하고 있는 개별재무제표와 취득가등 원칙을 근간으로 하는 회계처리기준.

· IFRS: 국제회계기준. 기업 회계와 재무제표에 대한 국제 통일성을 기하기 위해 국제회계기준위원회가 마련한 회계처리기준.

· 공정가치: 시장참여자 사이의 정상거래에 이용되는 가격. 즉, 시장에 근거한 측정치. 사용가치 등 기업 특유의 측정치와는 다르다.

최종학 서울대 경영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