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방위 물가제어 나선 정부…일각선 '금리 인상' 정공법 요구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장영진 산업통상자원부 1차관(가운데)이 20일 서울 마포구 전자회관에서 공산품·유통업체 대표가 참석한 가운에 '민생물가 안정을 위한 공산품 가격 점검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산업부 제공

장영진 산업통상자원부 1차관(가운데)이 20일 서울 마포구 전자회관에서 공산품·유통업체 대표가 참석한 가운에 '민생물가 안정을 위한 공산품 가격 점검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산업부 제공

치솟는 물가를 잡기 위한 정부의 시장 개입이 전방위로 거세지고 있다. 농림축산식품부는 20일 한훈 차관이 주재한 주요 식품기업 대표 간담회를 열었다. 간담회 형식을 띠었지만, 정부가 물가 안정 협조를 당부하는 자리였다. CJ제일제당·오뚜기·농심·롯데웰푸드·SPC·동원F&B·오리온·삼양·해태제과·풀무원·동서식품·매일유업·LG생활건강·대상·빙그레·샘표식품 등 국내 대표 식품회사 16곳 대표와 주요 임원이 참석했다.

같은 날 산업통상자원부는 장영진 1차관이 주재한 ‘공산품 가격 점검 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엔 전자정보통신산업진흥회·자동차산업협회·타이어산업협회·패션산업협회·체인스토어협회·편의점산업협회·프랜차이즈산업협회 등 주요 제조·유통 협회 임원진이 참석했다. 제조 업계뿐 아니라 유통업체까지 불러 물가 안정 협조를 당부했다.

전날인 19일엔 농식품부가 정부세종청사에 이마트·롯데마트·홈플러스 등 대형마트 3사를 불러 “원가 절감, 생산성 향상 등을 통해 가격 인상 요인을 최소화해달라”고 요구했다. 제조업체뿐 아니라 유통업체까지 전방위로 물가 안정을 압박하는 모양새다. 간담회에 참석한 한 업체 임원은 “현 정부가 출범한 뒤 ‘물가 안정에 협조해달라’는 요청이 많았지만 최근 들어 훨씬 직설적으로 ‘가격 인상을 자제하라’는 압박이 거세졌다”고 말했다

지난 16일 서울의 한 주유소, 휘발윳값이 L당 1795원이다. 뉴스1

지난 16일 서울의 한 주유소, 휘발윳값이 L당 1795원이다. 뉴스1

정부가 기업을 압박하는 건 물가 상황판에 경고등이 켜지면서다. 지난달 물가상승률은 3.7%를 기록했다. 5개월 만에 최대치다. 최근 국제유가가 급등하면서다. 석병훈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와 전쟁이 터지며 중동 정세가 불안해졌다”며 “미국을 중심으로 고금리 장기화 기조가 이어지는 것도 물가 상승을 부추겼다”고 말했다. 이어 “연말 3%대 초반 물가상승률을 기대한 정부 전망이 어긋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문제는 뾰족한 해결책이 없다는 것이다. 그동안 물가를 잡기 위해 정부는 주로 전기·가스·수도·교통 등 공공요금을 억제하는 대책을 앞세웠다. 하지만 공공요금은 올 초에 이미 일제히 올랐다. 내년 4월 총선을 앞둔 상황이라 더 올리기 쉽지 않다. 최근 농·축·수산물 할인 지원이나 김장철을 앞두고 배추·천일염 공급을 확대하는 등 단기 물가 대책만 쏟아진 이유다.

‘비상 상황’인 만큼 세계 각국은 통상에서 벗어난 특단의 대책을 꺼내기 시작했다. 국제유가에 민감한 미국 정부는 지난달 석유·가스 기업에 기름값 인하를 압박하며 “연간 지급하던 310억 달러(약 41조8000억원) 규모 세액 공제 혜택을 내년부터 없앨 수 있다”고 밝혔다.

프랑스 정부는 약 6개월간 주유소 등 유류 유통업체가 휘발유·경유를 매입가보다 싸게 팔 수 있도록 허용하는 내용의 법안을 추진 중이다. 경쟁을 유도해 주유소가 손해를 보더라도 기름값을 낮추겠다는 취지다. 영국은 1973년 이후 시행하지 않은 ‘식료품 가격 상한제’ 부활까지 검토하고 있다.

한미 기준금리 추이 그래픽 이미지. [자료제공=한국은행, 미국연방준비제도(Fed)]

한미 기준금리 추이 그래픽 이미지. [자료제공=한국은행, 미국연방준비제도(Fed)]

하지만 세계 각국의 비상 대책은 금리 인상을 하고도 물가가 잡히지 않자 낸 후속 조치다. 미국의 기준금리는 5.25~5.5%, 유럽연합(EU)은 4.5%, 영국은 5.25%다. 이달까지 6연속 동결한 한국의 기준금리(3.5%)와 격차가 크다. 게다가 한국이 선제적으로 기준금리를 올렸을 당시와 달리 글로벌 고금리 장기화 추세가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국내 금리 동결 기조가 불러온 부작용도 가시화하고 있다. 2분기 기준 가계부채는 1862조8000억원으로 전 분기보다 10조원 가까이 불어났다. 한국의 기준금리가 더 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일부에서 빚을 내 부동산·주식 투자에 나서는 이른바 ‘영끌빚투’가 고개를 든 영향으로 풀이된다.

외환보유액은 지난달 기준 4141억2000만 달러로 전달 대비 41억8000만 달러 감소했는데, 이 달러 대비 원화가치가 1400원대로 떨어졌던(환율은 상승) 지난해 10월(4140억1000만 달러) 이후 11개월 만에 가장 낮다. 금리 동결은 경쟁력을 상실한 한계 기업들의 퇴출을 막는 등 다른 경제·사회적 비용도 키우고 있다.

이 때문에 고통스럽더라도 물가를 잡으려면 금리 인상이란 ‘정공법’으로 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최근 나오고 있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과 교수는 “기준 금리를 올릴 경우 저성장이 심화하고 가계부채 상환 부담이 가중할 거란 우려가 있지만, 못지않게 장기간 금리 동결에 따른 부작용과 사회적 비용이 커졌다”며 “결정을 미룰수록 부담이 커지는 만큼 물가 안정 차원뿐 아니라 가계부채 등 경제 건전성을 관리하는 측면에서도 금리 인상을 검토할 시기가 왔다”고 말했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19일 금융통화위원회 직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금통위원 6명 중 5명이 금리를 3.75%로 올릴 가능성을 열어둬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며 “중동 사태가 심화해 물가가 오를 경우 금리 기조를 바꾸자는 견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수출ㆍ소비 위축을 감수하면서 한은이 금리를 올리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 이자 부담이 커지면 일부 한계 차주와  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등을 중심으로 대출 ‘폭탄’이 터질 수 있다는 점에서 한은의 고민은 크다. 조영무 LG경영연구원 연구위원은 “미국 등 선진국 경기 둔화 가능성이 커지는 가운데 한은이 금리를 올려 경기를 더 얼어붙게 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