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6개월 만에 '유럽 1위(시가총액 기준)' 기업이 바뀌었다. 프랑스 명품그룹 루이비통 모에헤네시(LVMH)를 제친 기업은 덴마크의 제약회사 노보 노디스크(Novo Nordisk)다. 이 제약사의 시총은 지난 26일(현지시간) 기준 약 4095억 달러(약 549조원). 인구 약 600만 명인 나라 덴마크의 기업이 유럽 최대 기업이 될 수 있었던 건 바로 '비만 치료제' 때문이다.
비만 치료제로 덴마크 경제가 들썩
이 제약사가 개발한 주사형 비만 치료제 위고비(Wegovy)는 미국에서 '기적의 다이어트 약'으로 불리며 품귀 현상을 빚고 있다. 이 약은 지난 4일 영국에서도 출시됐는데, 벌써부터 흥행 조짐을 보이고 있다. 한국에선 지난 4월 식품의약품안전처의 수입 판매 허가를 받아 국내 유통이 그리 멀지 않은 상태다.
"기적의 약이 덴마크 경제에 기적을 가져다 줬다"는 외신들의 평가가 나올 만큼 위고비의 경제적 효과는 엄청나다. 노보 노디스크의 실적 발표에 따르면 위고비는 올 2분기 매출이 전년 동기보다 543% 급증했다. 위고비의 인기 폭발로 노보 노디스크의 올 상반기 영업이익은 전년 동기 대비 30% 증가한 70억 달러(약 9조원)에 달했다. 이 회사의 주가는 2021년 초와 비교해 현재 300% 이상 급등했고, 올 들어 40% 상승했다.
위고비는 미국에서 2021년 식품의약국(FDA)의 사용 승인을 받았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 등 유명인들도 체중 감량 비결로 이 약을 꼽았다. 이 같은 위고비의 인기는 이전 비만 치료제들보다 감량 효과는 커지고 줄어든 주사 횟수 덕분이다. 비만 환자가 매주 1회 68주간 주사를 맞으면 체중 약 15% 감량 효과를 낸다고 한다. 반면 노보 노디스크가 2015년 출시했던 비만 치료제 '삭센다'의 경우 매일 주사를 놔야 했고, 같은 기간 체중 감량이 6% 정도에 그쳤다.
덴마크 GDP보다 큰 가치...국가 재정 확충
이미 덴마크 경제에서 노보 노디스크가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노보 노디스크의 시총은 덴마크의 국내총생산(GDP) 4060억 달러(약 541조원)보다 큰 규모다. 뉴욕타임스(NYT)는 덴마크 통계청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올 1분기 경제 성장률 1.9%에서 노보 노디스크가 1.7% 포인트를 차지한다"고 전했다.
이 회사의 매출은 덴마크의 2위 제약사 룬드벡의 10배나 되고, 시총 규모는 덴마크의 대기업 10개를 합친 것보다 크다. 덴마크 단스케은행의 수석 이코노미스트 라스 올슨은 텔레그래프에 "노보 노디스크의 이런 성장이 없었다면 덴마크의 GDP는 감소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노보 노디스크는 현재 덴마크에서 가장 많은 세금을 내는 기업으로 국가 재정 확충에도 기여하고 있다. 활발한 국내 투자로 새로운 일자리가 많아질 것이란 기대도 나온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노보 노디스크의 수출 호조로 덴마크에 달러가 많이 유입되면서 유로화 대비 덴마크 통화(크로네) 가치가 상승했다. 크로네를 약화시키기 위해 덴마크 중앙은행이 금리를 유럽 중앙은행보다 낮게 유지해 주택 구매자도 늘어날 것이란 관측이다. NYT는 노보 노디스크의 성과가 덴마크란 국가의 이미지를 제고하고, 다른 기업들의 혁신을 이끌어내고 있다고도 평했다.
비만 인구 증가에 비만 치료제 시장 급성장 전망
노보 노디스크는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인 덴마크 생물학자 아우구스트 크로그가 1923년 설립했다. 이후 현재까지 100년간 인슐린 등 당뇨병 치료제 개발에 몰두해 관련 업계 1위에 올랐다. 이 회사는 2017년 당뇨병 치료제 '오젬픽'을 출시했는데, 체중 감량 효과가 탁월하자 비만 치료제 버전인 위고비를 따로 만들었다. 수요 폭발로 미국에선 처방전이 있어도 위고비를 구하기 어려워지자 대신 오젬픽을 체중 감량 목적으로 처방받는 일마저 생기고 있다.
위고비와 오젬픽의 주요 성분은 제2형 당뇨병을 치료하는 물질인 '세마글루타이드'다. 식후에 분비되는 GLP-1 호르몬과 유사하게 만든 약물로, 포만감을 높여 식욕을 줄인다.
위고비의 향후 수요 전망도 밝은 상황이다. 현재 약 10억 명에 달하는 전 세계 비만 인구는 2035년 20억 명에 육박할 것이란 관측이다. 모건스탠리는 비만 치료제 시장 규모가 지난해 24억 달러(약 3조원)에서 2030년 540억 달러(약 72조원)까지 급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지난달 노보 노디스크는 위고비가 주요 심혈관질환 위험을 20% 낮췄다는 자체 연구 결과를 내놨다. 이에 따라 위고비가 보험 적용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아져 수요가 더욱 급증할 것이란 전망이다. 현재 미국에서 위고비의 한 달 투약 가격은 1300달러(약 173만원)로 보험 보장이 되지 않는다.
'제2의 노키아' 우려도
다만 장밋빛 전망만 있는 건 아니다. 일각에선 한 나라의 경제가 한 기업에 너무 의존할 경우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고 우려한다.
텔레그래프는 휴대전화 제조사 노키아 사례를 들었다. 2000년 노키아는 핀란드 수출의 20%를 차지할 정도로 핀란드 경제의 기둥이었다. 그러나 2007년 애플의 아이폰 등장과 함께 스마트폰 시대가 열리면서 내리막길을 걸었다. 이후 핀란드 경제는 10년간 경기침체에서 빠졌다.
노르디아은행 수석 경제학자 헬게 페데르센은 NYT에 "1960년대 천연가스 수출로 일시적 호황을 누렸지만 다른 경제 분야는 쇠퇴했던 '네덜란드 병'을 덴마크가 겪을 수 있다"고 말했다.
글로벌 제약사들이 비만 치료제 개발에 앞다퉈 뛰어든 상황이라 위고비의 독주에 제동이 걸릴 가능성도 있다. 당장 연내 FDA 승인이 예상되는 미 제약사 일라이 릴리의 마운자로는 위고비보다 체중 감량 효과가 더 높다고 알려졌다.
올슨은 "덴마크 경제의 미래는 노보 노디스크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얼마나 혁신을 지속하느냐에 달려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