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의 ‘동생들’ 통해 교도관에게 유흥업소 로비 벌여 사제물품 밀반입 하기도
교도소에서도 대장… 연쇄살인범 유영철도 태도 불량하다고 집단 구타 당해
조직폭력배와 교도소는 뗄 수 없는 사이다. 별(전과)을 달고 나와야 사회에서 ‘이권’과 ‘머릿수’가 생긴다. 조폭들에게 이권은 조직에서 사업체 운영을 허락 받는 것이고, 머릿수는 부릴 수 있는 부하들을 말한다. “20대 절반을 형님들 민원 처리하느라 교도소에서 보냈다. 그 뒤에야 ‘쩐주’를 소개받아 자본금을 받았다.” 서울 동대문구에서 활동하는 한 조직원 이모(29) 씨의 설명이다. 그는 사채를 빌려주고 돈을 번다. 물론 불법이다. 하지만 채무자의 집이나 회사를 찾아가 소리를 지른다든가 최근 언론에 보도된 것처럼 나체사진을 유포하거나 이런 ‘질 낮은’ 짓을 하지는 않는다. 돈 좀 있는 이들에게 담보로 외제차를 받아 놓고는, 살인적인 이자로 돈을 더 뜯다가 더 이상 쥐어짤 수 없을 때 그 외제차를 주변에 수백만원을 받고 빌려준다. 나중에는 전문업자를 불러 주행거리를 줄이기 위해 미터기를 조작한 뒤 대포차 업체에 넘기면 그만이다. 최소 원금의 5배 이상은 챙기는 장사다. 게다가 이 사업은 비수기가 없다.
이씨의 말처럼 교도소는 신입 조폭들의 관문이다. 일부러 폭력사건을 저질러 ‘신고식’을 자행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소년원 이력이 있으면 얘기가 달라진다. 일반 기업체로 따지면 검증된 포트폴리오로 쳐준다는 것. 전직 조폭 이모(42) 씨는 1998년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부산 사상구에서 친구들과 무리 지어 오토바이를 훔치거나 돈을 갈취하면서 생활했다. 지역 관할인 사상경찰서의 블랙리스트에 오른 것은 당연지사. 경찰의 관리를 받던 중 폭력사건을 저질러 징역 6개월을 받고 부산소년원에 들어갔다. 주먹으로 다른 소년수들과 서열정리를 했다는 그는 최고참 격인 ‘방장’이 됐고, 밖에서 ‘유망주’로 알려졌다. “출소 열흘 전에 문신은 하나 있어야겠다 싶어 서예반장을 불러 먹물을 갖고 오라고 했다. 방에 그림 잘 그리는 애가 하나 있길래 걔한테 먹물을 묻힌 바늘로 종아리에다 라인을 따게 했다.”
소년원 이력은 검증된 포트폴리오
조폭 세계에서는 어느 소년원을 나왔는지도 중요하다. 기자가 만난 다수의 조폭들에 따르면 2000년대 초반은 대전의 대덕직업전문학교(대덕소년원)가 가장 악명 높았다. 마침 이씨는 부산소년원 출소한 직후 다른 폭행 혐의로 대덕소년원에서 2년가량을 지낸 경험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2000년 5월 대덕소년원에서 벌어진 난동 사건의 중심에 있었다고 했다. 당시 언론에는 소년수 김모 군이 반장 선출에 불만을 품고 12명의 소년수를 동원해 소년원을 점거하고 교도관들을 폭행, 가스총을 빼앗은 사건으로 보도됐다. 이씨는 이를 좀 더 상세히 설명했다. “목욕탕을 이용하는 문제를 놓고 생활반장과 전산반장이 시비가 붙었다. 교도관들이 보도방에서 CCTV로 그 상황을 파악하고 보도실로 두 명을 불러 서로 싸운 경위를 따져 물었다. 교도관들이 서열이 더 높은 생활반장 편을 들면서 전산반장의 뺨을 때린 게 화근이 됐다. 화가 난 전산반장이 전산반의 소년수 30명을 동원해 보도실로 쳐들어가 소화기 핀을 뽑아서 선생들 얼굴에 쏴버리고 수갑 다 빼앗아 손목에 채워버렸다.”
결국 6시간 만에 특공대가 출동해 진압한 이 사건은 KBS에 작은 토막 기사로만 남아 있다. 이씨에 따르면 당시 난동을 주도한 전산반장 김모(42) 씨는 특수공무집행방해죄 등 혐의로 징역 5년을 산 뒤 고향 강원도에서 ‘조직’ 생활을 했다. 이씨도 출소 후 20대 초반 나이에 부산 사상구의 한 지역 조직에 들어가 비교적 수월하게 룸살롱 운영을 허락받았다고 한다.
잡범들과 달리 조폭들은 교도소에서도 대접을 받는다. “교도소는 건달이 왕이다. 안에서 서로 부딪히지만 않으면 발 뻗고 잔다.” 전국구로 알려진 ‘현직’ 조폭 김모(42) 씨의 말이다. 그는 불과 3년 전까지 전주교도소에 있었다. 그에 따르면 범단으로 엮인 조폭은 노란 명찰을 받고 재소자 방에 들어간다. 방에서는 방장 밑으로 배식방장·규율방장 등 나름의 서열이 있는데, 조폭은 이를 무시하고 들어가자마자 방장이 된다. 나이 불문, 혐의·형량 불문이다. 설거지나 청소, 배식 등에서 자유롭다. 그는 “교도관들도 터치를 안 한다. 방에 조폭이 있으면 규율이 잡히기 때문이다. 솔직히 교도관과는 공생 관계라고 봐야 한다”고 말한다.
교도관에게 진짜 골칫거리는 시도 때도 없이 시비를 거는 재소자다. “교도관도 사람인데 걸핏하면 코를 꿰려는 애들이 있다. 한여름에 더워서 교도관이 모자를 벗으면 ‘왜 세금으로 근무하면서 탈모(脫帽)하느냐? 30분마다 순찰을 돌아야 하는데 왜 1~2분씩 늦느냐’ 이런 식이다. 교도관이 감정적으로 대응하면 소장과 면담하겠다고 요청하고, 인권위에 진정을 넣어 괴롭힌다.” 하지만 조폭은 이런 재소자들을 고분고분하게 만든다. 장기 10~15년형이나 무기수가 아닌 바에야 사회 복귀만 기다리는 입장에서 조폭의 눈에 띄어 좋을 게 없기 때문이다.
교도소 안에서는 범죄 유형별로 순서가 정해진다. 김씨는 “조폭들이 가장 싫어하는 범죄자가 사기, 성폭행, 살인으로 들어온 재소자들이다. 사기범들은 접시꾼이라고 부른다. 걔들은 교도소에 들어와서도 입만 열면 거짓말과 허풍을 친다. 그래도 범털(영치금이 많은 사람)은 방에다 먹을 걸 사다 주니 어느 정도는 대우해준다. 성폭행범은 서열 제일 끝에다 두고 온종일 변기통만 닦게 한다. 나이 대접도 안 한다. 그리고 살인범의 경우 명분 없는 살인은 인정해주지 않는다. 안에 있다 보면 별의별 범죄자를 다 만난다. 매일같이 술 마시고 집에서 가족들에게 폭력 휘두르는 부친을 살해한 존속살인범이나 배우자가 바람난 사실을 알고 격분해 살인한 택시기사 같은 범죄자들이다. 우리가 그들한테 뭐라 하겠나.”
‘출력’ 나가는 공장은 건달 합숙소
흥미로운 것은 김씨가 2004년 서울구치소에서 연쇄살인범 유영철과 같은 방을 썼다는 점이다. 당시 김씨는 대포통장을 유통한 혐의로 구속됐는데, 그 방에는 서진룸살롱 사건으로 유명한 서울목포파 조직원과 청량리 살인 사건의 주범이 있었다고 했다. “그해 9월인가 유영철이 들어왔다. 교도관들도 터치를 안 하고, 아주 안하무인인 데다 남들 머리 위에 있으려고 했다. 그래서 사각지대에 몰아넣고 단체로 손을 봐주니까 비명을 꽥 지르더라. ‘밖에서 깡패 새X 하나 못 죽이고 들어온 게 한’이라고.” 실제로 유영철은 악성 재소자로 유명했다. 2011년 서울구치소에서 음란물을 밀반입하거나 교도관에게 폭행을 저지르는 등 교화 불능에 가까운 모습이 여러 언론에 보도된 바 있다.
교도소에서 조폭이 권력을 행사하는 가장 큰 무대는 공장이다. 흔히 출력을 나간다고 하는데 조폭들이 공장의 관리직을 맡는다. 2000년대 중반 중국 조직과 손을 잡고 대포통장 장사를 벌인 보이스피싱 1세대의 증언이다. “교도소에 있는 조폭이 전국구인지 아닌지는 공장에서 증명된다. 반장·작업반장·문방경리·소지반장·부식반장·요리반장 순으로 공장 서열이 나뉘는데, 직책 하나 못 얻은 애들은 족보도 없는 놈들이다. 돈 없고 내공 약한 반달들로 방구석에 앉아 일반 재소자들과 형님, 동생 하며 서열놀이 하는 거다.”
그에 따르면 이들 반장이 공장의 재소자 약 60명을 관리한다. 특히 민간에서 위탁 받아 운영되는 공장은 교도관들 감시가 허술해 공장에서 일하는 오전 시간대는 거동이 자유롭다. 일반 재소자들과 달리 일을 하지도 않는다. “밖에서 보면 대단한 권력은 아니지만 공장 관리직은 교도관도 잘 안 건드린다. 그날그날 할당량을 채울 수 있게 재소자들 기강을 잡아주니까… 또 형님들이 영치금으로 한 100만~200만원씩 써서 음식 사다가 난로에 불 피워 잘 먹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출력을 나가야 모범수로 빨리 인정돼 접견 횟수도 늘고 귀휴(휴가)도 잘 받는다.”
일단 공장에 가면 밖에서 서로 다른 조직원들이라고 해도 연차순으로 서열이 정리된다고 한다. 다만 부산과 호남은 지역감정을 고려해 교도소 측에서 공장 배정을 따로 한다는 설명이다. 부산 출신인 그는 그곳에서 부산 칠성파·동부칠성연합파·창원 북마산파·거제 옥포파·제주 땅벌파 등과 지냈다고 한다
물론 서로 다른 조직원들 간 갈등이 없는 것은 아니다. 2004년 부산의 양대 폭력조직인 칠성파와 유태파가 세력 확장을 위해 도심에서 연쇄적인 집단 유혈극을 벌이면서 갈등이 고조된 때였다. 그 소식에 광주교도소에서도 건물을 위아래로 같이 쓰던 칠성파와 유태파 간 전운이 감돌았다. 그때 건물 위층을 쓰던 칠성파 조직원이 창밖으로 신발을 던진 뒤 “내려가서 가져오겠다”며 교도관을 피해 아래층으로 내려가 근처에 있던 유태파 간부를 공격하면서 비상이 걸렸다. “난리도 아니었다. 교도소에 칠성파와 유태파 식구가 30명 가까이 됐는데 접견장에서도 치고 박고 매일 패싸움이 벌어졌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거나 아무 실적 없는 조폭들은 교도소에서 무시받지 않으려 조사 도중 검사에게 자신이 조직원이라고 털어놓기도 한다. 그는 “얼빠진 놈들이다. 조직원이라고 말하는 순간 위아래 계보를 전부 자백해야 한다. 그 순간 해당 조직이 수사기관 감시를 받는 것부터 잘못하다간 계좌추적까지 당하는데, 프락치 수준도 못 된다. 범단 기록 유무를 떠나 진짜들은 밖의 선배들이 잘 봐달라며 교도소 조폭들에게 영치금하고 편지를 붙여준다. 그럼 안에 있는 조폭들이 알아서 챙겨준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스운 건 요새 수도권에서 MZ 조폭이라고 하는 어린애들이 잡혀 들어가면 스스로 어느 조직에 있다고 허세를 부린다. 동기들과 안부 전화하면 그 아이들 때문에 골이 썩는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부산과 호남은 지역감정에 공장 배정도 달라”
거물급의 생활은 또 다르다. 2011년 김해 교도소에서 범서방파 김태촌을 목격했다는 전직 조폭 강모(40) 씨의 회고다. “그때 몸이 안 좋아서 그랬는지 공장에는 안 나왔다. 대신 6인 혼거실을 혼자 썼고 전담 소지(심부름꾼 역할하는 재소자)도 있었다. 보통 소지 1명이 재소자 30명을 관리하는데 그걸 교도소가 왜 모르겠나. 워낙에 조폭계 거목이니까 챙겨준 셈이다. 그래서 접견 갈 때 전담 소지가 휠체어 밀어주고 설거지나 빨래도 다 해줬다.”
일반 사회와 마찬가지로 교도소에서도 없는 물건을 갖고 다니면 갑(甲)으로 쳐준다. 그런 물건은 또한 부르는 게 값이다. 대표적으로 담배가 그렇다. 강씨는 “2000년대 초반까지는 교도관들이 직접 담배를 (재소자들에게) 팔아 돈을 벌었다. 그때 교도소 다녀온 사람들한테 물어보시라. 교도관들이 재소자들에게 담배 팔아다 번 돈을 와이셔츠 포켓에다 두둑이 꽂아넣은 채로 아무렇지 않게 교정을 돌아다녔으니까”라고 했다.
또 택배 반입이 허술하던 2010년대 중반까지는 재소자의 지인이 다량의 담뱃가루를 프레스로 찍은 다음 지퍼에 담아 상자 하단에 넣고 그 위에 자잘한 물품을 넣어 교도소에 부치는 수법이 인기였다고 한다. “그러면 교도소에서 나눠주는 성경책 끝단을 잘라서 돌돌 말아 피운다. 어차피 필터도 없어서 꽁초도 안 남는다.”
하지만 최근에는 교정 당국의 관리·감독이 엄격해지면서 이런 풍경은 사라졌다. 대신 재소자가 암암리에 직접 밀반입을 시도하게 됐다. 가장 편리한 방법은 공장에서 친해진 외부 직원을 통해서다. 강씨는 “한 개비당 4만원으로 값을 쳐준다. 그렇게 몇 보루 공수해서 본인이 몇 갑은 챙기고, 나머지는 한 개비당 8만원에 파는 것이다. 걸려봐야 벌금형이 고작이다”라고 했다.
자식 커가는 모습 보면 ‘손 씻어야겠다’ 결심도
조폭들은 흔적이 남는 돈거래보다는 접대 로비를 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밖에 있는 동생들을 시켜 공장 직원을 상대로 “형님을 잘 챙겨달라”며 유흥업소 접대를 해주면 태도가 180도 달라진다는 것이다. “헤어질 때 형님한테 스킨·로션을 전달해 달라면서 작은 가방을 넘기는데 그게 ‘함정’이다. 안에는 대마나 필로폰 소량분이 들어 있다. 물건을 확인한 상대는 깜짝 놀라겠지만 그때는 이미 코를 꿰인 뒤다. 담배고 뭐고 그때부터 형님이 원하는 사제(민간인들이 쓰는 물품)는 직원이 공수해서 갖다 바쳐야 한다.”
이런 식의 로비는 교도관을 상대로도 벌어진다는 후문이다. 휴대폰을 쓰게 하거나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도 눈 감아달라고 요구하기 위해서다. 강씨는 “실명을 밝힐 수는 없지만 부산에서 꽤 알려진 형님이 필로폰 중독이었다. 교도소에 들어가서 도저히 못 견딜 거 같으니 동생들에게 교도관 상대로 작업을 지시했다. 이쪽 세계에서도 마약쟁이는 인정 못 받는데 워낙 센 형님이니 결국 동생들이 작업을 쳐서 필로폰이 들어갔다고 들었다.” 강씨 주장에 따르면 이런 경우는 내부에서 적발되더라도 웬만하면 사건이 축소되는 게 다반사다. 언론에 터지면 최종 책임자인 소장까지 옷을 벗어야 하기 때문이다.
조폭이 교도소에서 상전 대접을 받는다 해도 교도소는 교도소다. 자청해서 교도소를 들어가려는 조폭은 없다. 형님의 죄를 뒤집어쓰고 조사실에 들어갔다는 한 전직 조폭은 한때 법정에서 사실을 고백할지 고민했다고 한다. “그때는 어려서 시키는 대로 했지만 처자식이 있는 지금이라면 일찍이 손 털었을 것이다. 공판 기일에 검사가 징역 8년을 구형하는데 몸에서 핏기가 싹 가시더라.”
실제로 조폭이 그 바닥에서 나오게 되는 계기는 결혼해서 자식이 커가는 모습을 지켜볼 때라고 한다. 그런 시기에 구속영장이 발부되면 다르게 살아야겠다고 결심한다는 것이다. 상해죄로 수원구치소에 들어간 이씨도 비슷한 사례다. 그는 선고 기일 전날 밤 ‘유서를 쓰는 심정’이라며 지금까지의 일을 모두 후회한다고 기자에게 장문의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대포폰을 쓰는 그의 카카오톡 프로필에는 아내와 딸 사진이 있다.
“그것도 잠깐이다. 구치소와 교도소를 들락날락하면 그 생활이 편해져서 고삐가 풀어진다. 10년 전에 들어가나 지금 들어가나 그 안에 ‘너 또 들어왔냐’며 반갑게 맞는 조폭들은 항상 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본인이 남에게 그런 인간이 되는 것이다.” 8년 전 그 세계와 절연했다는 전직의 충고다.
- 안덕관 월간중앙 기자 ahn.deokkwa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