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 못 쓰던 韓수영 단체전…14년만에 '맨몸'으로 역사 쓴 비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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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지난해 4월이었다. 대한수영연맹은 경영 남자 자유형 국가대표 황선우(20), 김우민(22·이상 강원도청), 이호준(22·대구광역시청), 이유연(23·한국체대)에게 호주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건넸다. 이들에게는 '아시안게임 대비 특별전략 육성선수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목표는 분명했다. "9월 열리는 아시안게임에서 우리도 한번 단체전 금메달을 따보자."

항저우 아시안게임 남자 계영 800m 금메달을 딴 김우민, 황선우, 이호준, 양재훈(왼쪽부터). 연합뉴스

항저우 아시안게임 남자 계영 800m 금메달을 딴 김우민, 황선우, 이호준, 양재훈(왼쪽부터). 연합뉴스

한국 수영은 그동안 국제대회 단체전에서 힘을 못 썼다. 1994년 일본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 지상준, 우철, 우원기, 방승훈이 남자 계영 800m 은메달을 딴 게 최고 성적이었다. '마린 보이' 박태환이 자유형 400m 금메달을 휩쓸던 시절에도 단체전 메달과는 인연이 없었다. 특출난 에이스 한 명과 다른 선수들 간의 실력 차가 너무 컸다.

선수들도 반신반의했다. 에이스 황선우가 세계 정상권 기록을 내고 있었지만, 한 사람의 힘으로는 이루기 어려운 목표라는 걸 모두가 알았다. 이들 넷이 2021년 7월 도쿄 올림픽 계영 800m에서 합작한 기록은 7분15초03. 세계 13위였고, 아시아에서도 중국과 일본 다음이었다. 다 같이 호주행 비행기에 오르면서도 '과연 가능할까' 싶어 고개만 갸웃했다.

이들은 그 후 6주간 호주 멜버른에서 이언 포프 코치와 함께 훈련했다. 포프 코치는 호주 경영 국가대표팀 감독을 거친, 전설적인 수영 지도자다. 한창 '월드 클래스'로 성장하고 있던 황선우에게 세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황선우는 포프 코치의 조언에 따라 잠영과 돌핀킥(양발을 움츠린 뒤 아래쪽으로 물을 차며 전진하는 동작)을 가다듬었다.

효과도 바로 나타났다. 호주 훈련 직후인 6월 헝가리 부다페스트 세계선수권 계영 800m 예선에서 7분08초49로 한국 기록을 경신했다. 1년 전 도쿄 올림픽 기록을 7초가량 당기면서 사상 처음 세계선수권 단체전 결선에 올랐다. 결선에선 예선 기록보다 1분56초 빠른 7분06초93의 기록으로 6위에 이름을 올렸다. 아시아 최강자로 꼽혔던 중국 대표팀보다 4초나 먼저 들어왔다. 황선우는 개인전인 자유형 200m에서도 박태환 이후 첫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호주 골드코스트에서 훈련하던 이호준, 김우민, 양재훈, 황선우(왼쪽부터). 사진 대한수영연맹

호주 골드코스트에서 훈련하던 이호준, 김우민, 양재훈, 황선우(왼쪽부터). 사진 대한수영연맹

다만 그 기세를 아시안게임으로 이어가지는 못했다. 코로나19 여파로 항저우 대회가 1년 연기된 탓이다. 그해 11월 국가대표 선발전이 다시 열렸고, 남자 자유형 200m 결과에 따라 이유연 대신 양재훈(25·강원도청)이 계영 새 멤버로 합류했다. 황선우, 이호준, 김우민, 양재훈은 그로부터 한 달 뒤 쇼트코스(25m) 세계선수권 결선에서 4위로 들어와 한국 수영 단체전 사상 최고 순위를 기록했다.

멤버가 한 명 바뀐 특별전략 육성선수단은 올해 2월 호주 브리즈번으로 떠나 다시 항저우 대회 준비를 시작했다. 이번에도 호주 경영 대표팀 지도자 출신인 리처드 스칼스 코치가 현지 훈련을 전담했다. 스칼스 코치는 2015년 세계선수권 자유형 100m 은메달리스트 캐머런 매커보이와 2022년 자유형 400m 금메달리스트 일라이자 위닝턴을 키운 스승이다. 자유형 단거리와 중거리에 특화됐고, 훈련 강도가 세기로 유명하다.

호주 골드코스트에서 스칼스 코치(오른쪽)과 훈련하던 김우민, 양재훈, 이호준, 황선우(왼쪽부터). 사진 대한수영연맹

호주 골드코스트에서 스칼스 코치(오른쪽)과 훈련하던 김우민, 양재훈, 이호준, 황선우(왼쪽부터). 사진 대한수영연맹

선수들은 한국과 계절이 반대인 호주의 한여름 땡볕 아래서 살갗이 까맣게 그을리도록 훈련에 매진했다. 골드코스트 마이애미 비치클럽에 소속된 현지 선수들과 뒤섞여 강도 높은 체력 훈련과 기술 훈련을 감행했다. 황선우는 "한국에서는 한 번에 4세트씩 하던 훈련을 브리즈번에서는 6세트, 많으면 8세트까지 해야 했다. 훈련 강도가 1.5배 정도 올랐다"고 혀를 내둘렀다. 이호준도 "우리나라는 야외 수영장이 마땅치 않아 실내 훈련만 할 수 있는 환경이다. 호주 전지훈련 때 야외 수영장의 악조건 속에서 강도 높은 훈련을 잘 버텨낸 게 도움이 됐다"고 했다.

포프 코치의 훈련 방식이 황선우에게 잘 맞았다면, 스칼스 코치의 지도법은 '이인자' 자리에 만족하던 이호준과 김우민의 잠재력을 끌어올렸다. 특히 자유형 400m가 주 종목인 김우민은 "코치님께서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400m 아시아 기록 보유자인) 쑨양(중국)도 이길 수 있다'고 격려하셨다"고 했다. 스칼스 코치는 35일에 걸친 집중 훈련을 마치면서 "황선우는 정말 수영을 잘한다. 그리고 다른 세 선수도 자신의 기대치보다 훨씬 더 잘할 수 있는 선수들이다"라며 "넷이 하나의 팀으로서 온전히 각자의 역할을 한다"고 높이 평가했다.

항저우 아시안게임 남자 800m 계영 결승에서 스타트를 끊는 양재훈, 이호준, 김우민, 황선우(왼쪽부터). 연합뉴스

항저우 아시안게임 남자 800m 계영 결승에서 스타트를 끊는 양재훈, 이호준, 김우민, 황선우(왼쪽부터). 연합뉴스

황선우, 이호준, 김우민은 귀국 직후 출전한 국가대표 선발전 남자 자유형 200m 결승에서 차례로 국제수영연맹 A기록(1분47초06)을 통과했다. 한국 수영에서 3명 이상의 선수가 A기록을 통과한 것은 2015년 동아수영대회 여자 접영 200m의 박진영, 박수진, 안세현 이후 8년 만에 처음이었다. 세계선수권 단일 종목 개인전에 선수 2명(황선우, 이호준)이 출전할 수 있게 된 것도 이들이 최초였다. 국가당 2명까지만 출전할 수 있는 규정 탓에 김우민의 200m 출전이 불발된 게 오히려 아쉬웠을 정도다.

아시안게임을 두 달 앞두고 열린 지난 7월 후쿠오카 세계선수권에서도 금빛 희망은 부풀어 올랐다. 한국은 남자 계영 800m 예선에서 7분06초72의 한국 기록으로 터치 패드를 찍어 아시아 국가 중 유일하게 2회 연속 결선에 올랐다. 결선에선 7분04초07를 기록해 오전에 세운 한국 기록을 2분 넘게 앞당기고 세계 6위를 지켰다. 에이스 황선우가 심한 감기몸살로 저조한 기록을 냈는데도, 이호준이 200m 개인 최고 기록을 올려 만회했다. 계영 대표팀에는 오히려 긍정적인 신호였다.

선수들은 그 후 아시안게임 개막을 손꼽아 기다렸다. 모두 하나같이 "계영을 정말 열심히 준비했다. 금메달을 꼭 따고 싶다"고 했다. 같은 목표를 향해 마음을 모으니, 팀워크도 갈수록 좋아졌다. 대한수영연맹 관계자는 "네 선수가 '우리라면 금메달을 딸 수 있다'면서 똘똘 뭉쳐 있다. 이렇게 분위기가 좋은 대표팀이 또 있었을까 싶다"고 귀띔했다.

항저우 아시안게임 남자 계영 800m 금메달을 딴 한국 선수들이 기뻐하고 있다. 연합뉴스

항저우 아시안게임 남자 계영 800m 금메달을 딴 한국 선수들이 기뻐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리고 마침내 기다리던 순간이 왔다. 황선우, 이호준, 김우민, 양재훈은 지난 25일 항저우 아시안게임 남자 계영 800m 결선에서 7분01초73의 아시아신기록으로 가장 빨리 물살을 갈랐다. 일본이 2009년 로마 세계선수권에서 남긴 종전 아시아 기록(7분02초26)을 14년 만에 0.53초 단축했다. 로마 세계선수권은 '과학이 만든 도핑'으로 불리는 전신 수영복 착용이 금지되기 직전에 열렸던 대회다. 한국 계영의 사총사가 '맨몸'으로 전신 수영복의 벽까지 넘었다.

황선우는 "지난 2년간 아시안게임만 보고 달려왔다. 아시아 신기록과 함께 금메달을 얻게 돼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기분 좋다"고 감격했다. 김우민은 "이 멤버들과 아시아 신기록의 순간을 함께할 수 있어서 더 기쁘고 영광스럽다"고 했다. 이호준은 예선에서 황선우와 자신 대신 레이스를 펼쳐준 이유연에게 "스타트를 잘 끊어줘서 고맙다"고 인사했다.

항저우 아시안게임 남자 계영 800m 금메달을 따고 기뻐하는 황선우, 김우민, 이호준, 양재훈(왼쪽부터). 연합뉴스

항저우 아시안게임 남자 계영 800m 금메달을 따고 기뻐하는 황선우, 김우민, 이호준, 양재훈(왼쪽부터). 연합뉴스

'황금 세대'의 전성기를 맞이한 한국 계영은 이제 더 높은 곳을 바라본다. 내년 열리는 파리 올림픽이다. 그동안 세계 무대에선 상위권 국가와 격차가 크다고 여겼는데,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더 원대한 가능성을 확인했다.

7분01초73은 런던 올림픽 계영 800m에서 은·동메달을 가져간 러시아올림픽위원회(7분01초81)와 호주(7분01초84)의 기록보다 좋다. 2년간 넷이 힘을 합쳐 무려 14초가량을 줄여나간 결과다. 한국 수영이 올림픽 단체전 메달을 목에 거는 장면도 이제 더는 꿈이 아니다.

양재훈은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손에 넣자마자 "이제 내년에 열릴 파리 올림픽까지 잘 준비하겠다"고 새 각오를 다졌다. 황선우도 "우리 남자 800m 계영 대표팀은 올림픽과 세계선수권을 바라보며 함께 나아가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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