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실 한쪽에 놓인 화이트보드에 거미줄처럼 얽힌 전자지갑 흐름도와 가상자산 시세 차트가 빼곡했다. 지난해 7월부터 가상자산 범죄 수사에 전념해 온 기노성(49·사법연수원 36기) 서울남부지검 가상자산범죄합동수사단 부부장검사의 방이다. 그간 베일에 싸여 있던 코인 상장 브로커를 법정에 세운 것도, 사기성이 짙은 코인 발행사 경영진을 사기 혐의로 구속기소한 것도 모두 이 방에서 후배 검사들과 일궈낸 결과물이었다.
기노성 검사는 가상자산 범죄에 범죄단체조직죄를 적용하는 걸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지난 8일 ‘가상자산의 규율에 대한 법적 과제’란 주제로 열린 대검 형사법 아카데미에서 “속칭 ‘김치코인’‘스캠코인’을 지속적으로 발행해 사기 판매하는 조직, 조직적인 불법 환전을 통한 전문 돈세탁 업체 등의 경우에는 ‘범죄집단’으로 의율해 기소하는 방안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지난 21일 기 검사를 만났다.

기노성 검사가 지난 21일 서울남부지검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 가상자산범죄에 범죄단체조직죄(범단죄)가 왜 필요한가.
- “조직화와 전문화라는 속성을 동시에 갖고 있어서다. 사기코인 발행조직은 내부에 법인·자금을 관리하는 지원팀, 토큰·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하고 관리하는 개발팀, 코인 시세조종과 매도·정산 업무를 담당하는 MM(Market Making·시장조성)팀 등을 두고 조직적으로 코인을 제조·유통한다. 하지만 각 구성원이 모든 정보를 공유하지는 않는다. 이 때문에 전체 범죄의 핵심 역할을 하면서 큰 이익을 얻은 구성원이어도 공동정범으로 처벌하기 곤란할 수 있다. 범단죄를 적용하면 이런 한계를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다.”
- 그게 어떻게 가능한가.
- “엄밀히는 ‘범죄단체’가 아니라 ‘범죄집단’으로 의율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범죄집단은 범죄단체와 달리 최소한의 지휘통솔관계가 없어도 된다는 게 대법원 판례다. 다만 ①범죄 수행의 공동 목적 ②조직적 역할 분담 ③반복적인 범죄 실행이라는 요건은 충족해야 한다. 상장·마케팅 브로커가 건별로 수수료를 받더라도, 전체 범행의 한 축을 담당하면서 자신의 역할을 여러 차례 실행하고 거액의 대가를 받았다면 범죄조직의 일원으로 볼 여지가 있다.”
검찰이 ‘범단죄 카드’를 꺼낸 건 현재 한국 사회에서 가상자산 범죄의 폐해가 그만큼 크다는 것을 방증한다. 이용자 약 627만명, 시가총액 약 19조원, 1일 평균 거래량 약 3조원에 달하는 거대 시장으로 성장하는 동안 그 안에서 횡행하는 각종 불공정거래 행위는 사실상 방치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기 검사는 “가상자산범죄 피해는 사회가 용인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고 진단했다.
- 가상자산시장의 어떤 특성이 폐해를 낳나.
- “가상자산은 주식과 달리 내재 가치가 없다. 오로지 시장에서 거래되는 가격으로 가치가 형성된다. 변동성이 크고, 투기성이 높다. 금융회사를 통한 간접투자보다 직접투자가 대부분이다. 공신력 있는 기관이 아니라 풍문으로 허위·과장 정보가 유포되면서 코인 매수를 유도한다. 투자상품에 대한 위험성 고지도 가상자산시장에선 유명무실하다. 이 때문에 20~40대 저연령·비전문 투자자가 초기에 큰 손실을 경험해도 오히려 투자 금액을 늘려 이를 만회하려다 회복할 수 없는 경제적 손실을 보는 경우가 많다. 큰 변동성 때문에 큰 이익을 얻는 소수의 투자자도 있지만, 조직적으로 조작된 시세에 쉽게 노출되는 일반 투자자가 그럴 확률은 낮다.”
- 피해를 막을 방법이 있을까.
- “수사가 능사는 아니다. 수사가 이뤄질 때쯤이면 이미 문제가 곪아 터질 지경에 이른 경우가 많아서다. 소관 부처에서 가상자산시장의 건전성과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한 영업규제책을 선제적으로 마련할 필요가 있다. 가상자산사업자의 자율성에만 기대기는 힘들다. 주식시장과 유사한 공시제도를 도입해 예측 가능성과 발행사 측의 책임성도 높일 필요가 있다.”

서울남부지검 허정 2차장검사가 지난 4월 11일 코인원 상장 비리 사건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허 차장검사 왼편에 이승형 당시 금융조사1부장(현 대검 반부패2과장), 기노성 당시 금조1부 부부장검사가 서 있다. 뉴스1
한국에 가상자산거래소가 등장한 건 2014년이다. 투자자 보호를 위한 가상자산법은 그로부터 약 10년 뒤인 내년 7월에야 시행된다. 그마저도 법률 해석상 논란과 미비점이 계속 제기되고 있다. 검찰이 코인원 상장 비리 사건을 수사하면서 불법 상장피(fee·수수료)나 시세조종을 거래소에 대한 업무방해로 의율한 것도 이러한 입법 미비 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아이디어였다.
- 거래소를 업무방해의 피해자로 본 건 사실상 거래소에 면죄부를 준 것 아닌가.
- “거래소의 상장심사 업무는 보호할 가치가 있는 중요한 업무다. 하지만 거래소가 발행사 측과 결탁해 부당하게 코인을 상장하는 등 불법 거래를 했다면 보호할 가치가 없다. 업무방해죄 적용으로 거래소가 면책을 받는 건 전혀 없다.”
- 가상자산법 규제 바깥의 신종범죄는.
- “사설 OTC(Over The Counter) 업체를 통한 불법 코인환전 이슈가 있다. 원래 장외거래를 뜻하는 OTC는 가상자산 업계에선 P2P(Peer to Peer·사인 간 거래)로 이뤄지는 가상자산 환전업을 의미하기도 한다. 온라인은 물론이고, 오프라인에서도 마약 거래 하듯이 콜드월렛(cold wallet·USB에 담긴 전자지갑)을 주면 현장에서 현금으로 바꿔주고 수수료를 챙기는 사례까지 발견된다. 사실상 돈세탁을 돕는 행위이지만 범죄수익은닉 혐의가 인정되지 않으면 마땅한 처벌 조항이 없다. 가상자산의 특수성을 반영한 보완 입법이 이뤄질 필요가 있다.”
기 검사는 증권금융분야 2급 공인전문검사(블루벨트)다. 2018년 처음 가상자산거래소 수사를 맡으면서 이 세계에 눈 떴다. 그는 “가상자산시장에선 익명 뒤에 숨어 많은 돈이 흘러다닌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실제 해외 거래소 계정에서 수천억원, 국내 거래소 계정에서 수백억원이 오가는 것을 확인했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가상자산 관련 두 편의 논문을 낸 그는 “가상자산을 금융상품으로 분석하는 논문을 쓰고 싶다”며 “처음에는 가상자산을 금융시장에 편입하는 데 업계의 저항이 많았지만, 지금은 최소한 그 정도는 합의가 이뤄진 것 같다”고 덧붙였다. 그는 25일 광주지검 공판부장으로 일터를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