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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수표보다 나영석 택할 것" 이명한 대표가 회사 옮긴 이유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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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Note

'1박 2일'부터 '지구오락실'까지. 모두 한 사람이 이끈 조직에서 나온 결과물입니다. 바로 이명한 에그이즈커밍 대표죠.

올해로 28년째 콘텐츠 업계 최전선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1996년 KBS에 입사해 '1박 2일' '스타골든벨' 등 전무후무한 시청률을 기록한 예능 프로그램을 기획 후 돌연 CJ ENM으로 이적합니다. 당시 평균 시청률 1% 이하였던 신생 채널 tvN을 지휘해 '응답하라' 시리즈, '코미디빅리그' 등 장르를 넘나들며 대표작들을 만들어냈죠.

이후 tvN 제작본부장, 티빙 대표이사를 거쳐 2023년 3월부터는 나영석·신원호 PD가 속한 제작 스튜디오 에그이즈커밍의 대표직을 맡아 또 한 번의 ‘변화’를 택했습니다. 소탈한 모습으로 인터뷰 장소에 도착한 그는, 시종 편안하게 분위기를 이끌었습니다. 최고의 팀을 만든 ‘덕장’의 면모가 엿보였어요. 그에게 28년간 콘텐츠 업계에서 느낀 변화의 흐름을 물었습니다.

※ 이 기사는 '성장의 경험을 나누는 콘텐트 구독 서비스' 폴인(fol:in)의 '프로의 5가지 기술'의 1화 중 일부입니다.

“제 커리어를 돌아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인터뷰 내내 솔직한 소회를 들려준 이명한 에그이즈커밍 대표. [사진 최지훈]

“제 커리어를 돌아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인터뷰 내내 솔직한 소회를 들려준 이명한 에그이즈커밍 대표. [사진 최지훈]

이번만 잘되면 레드카펫? “100% 오산”

Q. 에그이즈커밍으로 옮기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과정’을 즐겁게 만들 동료가 거기에 있으니까요.

콘텐츠 제작은 가파른 계단과 비슷하거든요. 몹시 어렵게 계단 하나를 올라가서 ‘아, 이제 됐다’ 했는데 또 벽이 나오는 거죠. 콘텐츠 제작 전 과정에 10시간이 걸린다고 예를 들어볼까요? 결과물이 잘 되든 망하든 일희일비하는 시간은 2시간 남짓에 불과해요. 나머지 7~8시간은 그 벽을 기어오르는 데 쓰는 거예요.

가끔 이런 경우가 있어요. ‘이번만 버티자, 이번 콘텐츠 잘 되면 내 인생 레드카펫 깔리겠지’ 생각하는데요. 그건 정말 오산이에요(웃음). 좋은 결과를 얻으면 인생 전체가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하지만, 진짜로 행복하려면 일하는 과정 자체가 행복해야 하거든요. 그건 동료들이 있을 때 가능하고요.

Q. 나영석·신원호 PD, 이우정 작가가 그런 동료군요.

맞아요. PD에게 3가지 선택지를 준다고 가정해볼까요? ① 아무도 한 적 없는 초일류 거물급 섭외 ② 제작비 백지수표 ③ 마음 맞고 실력 있는 후배. 만약 에그이즈커밍 동료들에게 물으면 다들 뭘 택할까요? 아마 다들 3번을 택할 거예요. 적어도 저는 그럴 겁니다(웃음).

공들여 섭외했음에도 결과물이 별로라면, 셀럽과의 관계는 그걸로 끝이에요. 단단하고 좋은 콘텐츠를 만든다는 게 알려지면 거물급은 알아서 찾아옵니다. 그걸 목표로 KBS 시절부터 20년째 함께 달려온 사람들이죠.

이들이 한국 예능과 드라마에서 최고의 키 플레이어라는 건 모두 인정할 거예요. 지금도 계속 주목받는 콘텐츠를 만들어내고 있고요. 제가 2023년 3월에 에그이즈커밍에 합류했는데요. 콘텐츠를 만드는 좋은 플레이어가 이미 있으니, 어떤 판을 만들어 그걸 더 많이 보여줄지에 대한 고민이 제 몫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는 인터뷰 내내 ‘동료들’을 강조했다. 커리어 내내 단단한 팀십을 다져온 비결이 엿보였다. [사진 최지훈]

그는 인터뷰 내내 ‘동료들’을 강조했다. 커리어 내내 단단한 팀십을 다져온 비결이 엿보였다. [사진 최지훈]

Q. 어떤 부분을 고민하세요?

OTT에서 잘되는 콘텐츠와 TV형 콘텐츠는 다른 영역이고, 제작에도 차별을 둬야 해요. 에그이즈커밍에서 만드는 ‘지락실’이나 ‘서진이네’ 같은 콘텐츠는 TV IP라고 봅니다. 반면 ‘나불나불’ 같은 콘텐츠는 TV도 OTT도 아닌 제3의 IP죠.

제가 합류했을 때 이미 구독자가 560만명이었어요. 이 또한 하나의 시장이 분명히 된다고 봐요. 인하우스에 있는 제작자라면 자신이 속한 플랫폼이나 채널에 집중해야겠지만 에그이즈커밍은 독립된 제작 스튜디오이니 이 2가지 시각을 모두 아우르는 콘텐츠를 만들어야겠죠.

지금 한국 예능 콘텐츠는 크게 2종류예요.

1) 린백(lean back)형
말 그대로 소파에 등을 기대고 편안하게 시청할 수 있는 콘텐츠예요. ‘나불나불’이 이 카테고리에 있죠. 가끔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듣고 있어요’라는 댓글도 달리더라고요. 마치 과거의 라디오 방송처럼 누구나 쉽게 접근해서 볼 수 있는 콘텐츠가 여기에 속하겠죠.

2) 몰입형
반대로 엣지가 강하고 취향을 뾰족하게 저격하는 유료 속성이 강한 콘텐츠가 있죠. ‘사이렌’이나 ‘피지컬100’처럼요. 다양성, 그리고 플랫폼 맞춤형 콘텐츠가 아주 세분돼 있다는 게 요즘 트렌드인데요.

여기에 더해, 글로벌 예능을 만들려고 준비 중이에요. 현재 아시아 지역까지는 한국형 예능이 낯선 콘텐츠는 아닙니다만,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는 예능은 아무래도 포맷이 정형화돼 있어요. 반면 한국형 예능인 리얼 버라이어티는 다큐에 가깝습니다. 상황과 상황 사이에서 빚어내는 서사의 강력함이 있고, 자막을 통해 스토리텔링하는 장르죠. 이런 제작 특성은 아무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이 부분을 사업적으로 다듬어서 존재감 있는 장르로 만들어가고 싶은 목표를 갖고 있어요.

“글로벌 K-예능 만들고 있어요” [사진 최지훈]

“글로벌 K-예능 만들고 있어요” [사진 최지훈]

기획안과 기획자의 ‘페어링’ 중요

Q. tvn 본부장 시절 버라이어티, 코미디 프로그램, 드라마 등 모든 영역을 기획하셨는데요. 아이디어의 실마리를 찾는 방법이 궁금합니다.  

기획에서는 2가지가 중요한데요. ① 아이디어 ② 만드는 사람이에요.

대부분 기획안에서 판가름난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오히려 제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이에요. 기획안은 조심스럽게 판단하거나 유보를 많이 하고요. 드라마는 대본이 있기 때문에 객관적 판단이 되지만, 예능은 기획안 몇 장이 전부이기 때문에 기획만으로 판단하는 건 불가능하거든요.

대신 이 기획을 가져온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평소에 다각도로 파악하려 노력해요. 콘텐츠엔 만드는 사람의 정서와 성향이 반영돼 있어요. 그걸 파악하지 못하면 기획안과 만드는 사람의 ‘페어링’을 정확히 판단할 수 없죠. 이를테면 평소 멘탈이나 체력 면에서 약한 동료가 굉장히 하드워킹해야 하는 버라이어티를 가져오면 완주가 어렵거든요.

Q. 그러려면 동료, 특히 후배들과 평소에 굉장히 가깝게 지내야 할 텐데요. 리더로서 쉽지 않은 일입니다.

감정 촉수가 예민하고 섬세한 사람이라고 자평해요. 안 그렇게 생겼지만요(웃음). 오래 일하며 느끼게 된 건데요. 크리에이티브적인 소양을 기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엔 능력있는 동료들이 나와 함께 일하려면 일뿐 아니라 인간적 관계에서의 공명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어요. 그리고 한번 그 주파수를 맞춰두면, 리더를 굉장히 신뢰하게 됩니다. 이 사람이 나를 이해하고 있구나 ‘안전감(psychological safety)’을 느끼죠. 관리자로 일할 때 이 부분이 강점이 됐어요.

Q. 수많은 후배 PD들을 봐오셨을 텐데요. 크게 성장하는 사람들은 무엇이 달랐는지요?

100%라고 할 수는 없지만, 디테일을 잘 챙기는 꼼꼼한 성향들이 많았어요. 또 태도적인 면에서 올바른 관점을 갖고 있었고요. 방송 윤리뿐 아니라 사람을 대하는 시선 자체가 따뜻한 사람들이랄까요. 그러면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같이 일하는 팀도 안정감을 느껴서 더 시너지가 잘 나게 돼요. ‘응답하라’나 ‘슬의생’ 시리즈도 이제 종영한 지 오래됐지만, 다들 어제 프로그램이 끝난 것처럼 여전히 끈끈하죠.

에그이즈커밍이 현재까지 가진 정체성도 결국엔 ‘사람 냄새’예요. 한국어로 하면 “계란이 왔어요”잖아요? 계란말이 반찬을 싫어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누구나 편안하고 부담스럽지 않게 즐길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고 싶다는 것. 결국엔 콘텐츠와 사람이 하나의 맥락으로 다 연결되네요.

그에게 콘텐츠는 곧 사람이었다. 좋은 사람에게서 좋은 콘텐츠가 나온다고 설명하는 모습. [사진 최지훈]

그에게 콘텐츠는 곧 사람이었다. 좋은 사람에게서 좋은 콘텐츠가 나온다고 설명하는 모습. [사진 최지훈]

5년 후에 회사 망할 수도 있어, 그럼 나는?

Q. 1996년에 KBS 공채로 입사한 후 28년째 일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오래 일할 거라 예상하셨나요?

전혀 몰랐습니다. 국장이니 본부장이니 대표이사니, 이런 게 될 줄도 몰랐어요(웃음). 어떻게 이렇게 오래 일했나, 생각해보면 저에게 가장 두려운 시청자는 결국 동료였어요. 방송 나가기 전에 내부에서 시사를 하거든요. 그 반응이 가장 두렵죠. 두 번째 허들은 예전에 있던 ‘웃음 더빙’이었어요. 웃음소리를 녹음하는 건데요. 듣다 보면 이게 진짜 웃음인지, 아니면 소리만 내는 건지 단박에 알아요. 진짜 웃음소리가 아니면 애가 타는 거죠(웃음). 승부욕이나, 자존심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을 텐데요. 그 축이 저를 지금까지 이끈 것 같아요.

Q. 롱런의 비결이 궁금합니다.

후배들에게도 분기나 반기마다 5년 후 모습을 그려보라고 얘기해요. 요즘 업계 속도로는 3년 후로 바꿔야겠네요. 시장에서 나는 어떤 모습으로 일할지 정체성을 만들고, 거기에 대해 준비하라고요. 월례회의에서든 술자리에서든, 5년 후엔 PD라는 직업의 정체성도 많이 바뀔 수 있다고 거듭 강조했어요. “지금 우리는 tvN이라는 조직 내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 또 나는 이 조직을 담당하고 있다. 하지만 5년 뒤엔 ‘지금 이 공간이 아닌 새로운 영역에서 함께할 수 있는 준비와 상상을 하자”라고 종종 얘기하곤 했습니다.

Q. 새로운 흐름이나 방향을 캐치하기 위해 노력하시는 부분이 있나요?

업계 한복판에 있다 보니까 자연스레 캐치하게 되는 것도 물론 있어요. 중요한 건, 전문성에 깊이를 더하는 개인의 노력이에요. 내 본업 외 음악, 미술, 문학 등 한 분야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와 관점이요. 젊었을 때 시작해서 10년간 꾸준히 하면 전문가로서의 깊이는 얼마든 가질 수 있다고 보거든요. 콘텐츠 업계는 이 업을 정말 좋아해서 온 사람이 많아요.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소진되지 않으려면, 의도적으로 본인만의 것을 채워야 해요. 그래야 지치지 않거든요.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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