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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윤병세의 한반도평화워치

정상외교는 최고의 외교자산…복합위기 시대 넘어서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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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윤병세 전 외교부 장관

윤병세 전 외교부 장관

외교장관들이 좌우명으로 삼는 말 중에 ‘Be at the Table or Be on the Menu’가 있다. 이해 관계자임에도 협상 테이블에 앉지 못하면 거꾸로 먹잇감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국익을 놓고 한 치도 양보 없이 싸우는 외교전쟁을 상징하는 말이다. 20세기 초·중반 힘이 없던, 쓰라린 시기를 기억하는 우리에게 세계 10위권 국가로 부상한 현재에도 경각심을 일깨운다.

8월 ‘캠프 데이비드 회의’ 성공
‘포스트 탈냉전’ 질서 주도해야
앞으로 1년이 정상외교 황금기
‘G7플러스’ 전략적 로드맵 필요

이러한 외교 전쟁 중 가장 강도가 높은 게 정상외교다. 역사의 현장에서 국익을 수호해야 한다는 엄청난 중압감에다가 빡빡한 일정 속에서 고도의 집중력과 체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지난 8월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담이 대표적이다. 새로운 한미일 3국 관계와 인태 질서 형성에 우리가 객체가 아닌 주체로 미국·일본과 대등하게 참여해서 역사적 합의를 주도했다.

국익 확보의 최대 경쟁 무대

지난달 18일 미국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담 이후 기자 회견에 참석한 한미일 정상. 왼쪽부터 윤석열 대통령, 바이든 미국 대통령, 기시다 일본 총리. 연합뉴스]

지난달 18일 미국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담 이후 기자 회견에 참석한 한미일 정상. 왼쪽부터 윤석열 대통령, 바이든 미국 대통령, 기시다 일본 총리. 연합뉴스]

캠벨 백악관 인태 조정관은 지난 수개월간 한·일 양국 정상 간 셔틀외교와 윤 대통령 국빈 방미, 히로시마 G7정상회의와 캠프 데이비드 별도 3국 정상회담까지 파노라마처럼 전개된 이정표적 계기를 ‘숨 막힐 정도로 극적(breathtaking)’이라고 말한다. 45년 전 이집트·이스라엘·미국 간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담 못지않게 한미일 정상이 상호 신뢰 구축과 리더십의 중요성을 웅변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상외교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국익 확보의 최상의 수단이 되어 정상들 간의 외교의 장은 연중무휴로 열리고 있다. 또한 새로운 회의체가 경쟁적으로 생기고 있다. 따라서 외교 협상 테이블에서 얼마나 제 목소리를 내느냐가 요리를 즐길지 메뉴판 속 먹잇감이 될지를 좌우한다.

바이든 대통령이 2020년 대선에서 당선된 후 일성이 “미국이 (트럼프 때와는 달리) 다시 테이블의 주빈석에 앉게 되었다(US is back at the head of the table)”였다. 2009년 ‘국제경제협력의 최고의 협의체’로 공식 규정된 G20 정상회의 창설 과정에서 빠진 많은 중견국은 커다란 좌절감을 겪었다. 지난 8월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담과 같은 시기에 열린 BRICS 정상회의(비서방 5개국 정상회의체)에 20여개국이 가입을 희망했지만 우선 6개국만 신규 회원국으로 가입되었다. 중국도 다음달 일대일로 정상회의에 푸틴 대통령을 포함한 수십 개국 정상을 초청하여 세를 과시할 예정이다.

이처럼 세계화가 퇴조하고 진영 간 대립이 거세지고 있는 복합위기 시대에 정상외교의 역할은 더욱 중요하다. 특히 국력이 큰 나라일수록 지역과 세계 문제에 대한 이해관계와 책임감이 크다. 우리나라도 더 이상 변방 국가가 아닌 핵심 국가가 되었다. 한반도 문제를 넘어 세계질서 형성에 이해관계가 커지고 있다.

그제 윤석열 대통령이 세계질서를 논하는 정상외교 행사 중 가장 규모가 큰 무대인 유엔총회에서 193개 회원국을 대상으로 북러 군사협력에 경고하는 강력한 기조연설을 한 게 단적인 예이다. 윤 대통령은 이번 달에만 ‘아세안+3’ ‘동아시아 정상회의’ ‘G20 정상회의’에 연이어 참석했다. 작년 5월 취임 이후 100여개국 정상과 140여회 정상회담을 가졌다.

지난주 북·러 정상회담과 10월 중·러 정상회담 이후 개최되는 11월 샌프란시스코 APEC 정상회의는 미·중 정상회담 개최 여부를 포함하여 인태 질서의 향방을 가늠하는 시험대가 될 수도 있다.

정상외교 중에서도 난도가 가장 높은 것은 제도화 초기에 의제 설정 등 주도력을 발휘하거나 오랫동안 결렬된 회의체를 정상 복원하는 것이다. 우리가 주최한 2010년 G20 정상회의, 2012년 핵안보 정상회의, 2015년 한중일 정상회의 등은 이러한 역량을 발휘한 것이다.

윤석열 정부도 향후 1년간 고난도 정상회의를 잇달아 주최할 예정이다. 커다란 도전이자 이정표적 기회이다. 정상회의 주최 빈도와 동원력(convening power)은 국력 상승의 주요 척도이자 국제질서 주도의 척도이기 때문이다. 조만간 우리가 의장국인 한일중 정상회의를 4년 반 만에 주최하게 될 경우 한·중 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동북아 정세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내년 상반기 중 최대 백수십개국 정상이 참여하는 제3차 민주주의 정상회의를 한국에서 주최하면 규범 기반 국제질서의 주도국으로 우뚝 서게 된다. 우리가 제안한 제2차 한미일 정상회의의 성공적 개최는 지속가능성의 시금석이다. 내년부터 유엔 안보리 비상임이사국을 수임함에 따라 안보리 정상회의를 주재해서 기능부전에 빠진 안보리 활성화 대책을 논의할 필요성도 크다.

지난해 5월 출범한 한국 신정부가 한 달여 만에 30여개국 정상이 참여하는 나토 정상회의에 참석한 이래 1년 반도 안 되는 기간 동안 역내 및 글로벌 질서를 논의하는 핵심 정상회의에 빠짐없이 참석하거나 초청되었다. 또 앞으로 전례 없이 많은 정상회의를 연이어 주최하게 되었다. 이는 우리의 국력 상승을 토대로 우리가 글로벌 비전하에 전략적 로드맵을 갖고 움직이기 때문으로 본다.

세계 외교 테이블의 핵심국

지난 수년간 남북관계에 치중한 나머지 정체되고 주변화되었던 우리 외교가 부활하고, 특히 정상외교에 탄력과 가속도가 붙으면서 한국외교는 이제 세계 외교 테이블에 핵심국으로 자리 잡는 단계로 진입하였다.

그럼에도 지정학과 지경학, 그리고 지기학이 세력 판도를 흔드는 지각변동 시대에 G20을 넘어 ‘G7 플러스’라는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상석 테이블에 앉으려면 외교·군사 경제·기술·문화 등 경성 국력과 연성 국력을 합친 통합 외교를 민관이 함께 펼쳐야 한다.

난마처럼 얽힌 복합 난제를 푸는 데 정상외교와 외교안보경제 공동체가 견인차 구실을 해야 한다. 외교 인프라의 대폭 강화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처칠 전 영국 총리가 말했듯 연은 순풍이 아니라 역풍에 높이 난다.

윤병세 전 외교부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