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김일성 “김대중 지지하라”…DJ “그런 짓 말라” 북에 항의-김대중 육성 회고록〈19〉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2면

김대중 육성 회고록 〈19〉

1992년 12월 실시된 14대 대선에 출마한 후보들의 포스터. 왼쪽부터 김영삼(민주자유당), 김대중(민주당), 정주영(통일국민당) 후보. [사진 중앙선관위]

1992년 12월 실시된 14대 대선에 출마한 후보들의 포스터. 왼쪽부터 김영삼(민주자유당), 김대중(민주당), 정주영(통일국민당) 후보. [사진 중앙선관위]

1992년 12월 18일의 14대 대선은 민주당 김대중(DJ)과 민주자유당 김영삼(YS)이 각축을 벌이고, 통일국민당 정주영이 변수로 작용하는 구도였다. YS와 초박빙의 경쟁이었지만 나(DJ)는 승리를 자신했다.

그런데 대선을 두 달 앞둔 10월에 선거판을 뒤흔드는 색깔론이 또 불거졌다. 안기부가 내놓은 ‘남한조선로동당 중부지역당’ 간첩단 사건이다.

안기부는 “북한에서 남파된 거물급 간첩 10여 명이 10여년간 암약하며 사회 각계각층 400여 명을 조직원으로 포섭해 대남 적화공작을 해 왔다”고 발표했다. ‘남로당 사건 이후 최대 규모의 간첩사건’이라 불리며 정국을 요동치게 했다.

그러면서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서열 22위인 거물 간첩’ 이선실이 우리 집에 와서 아내(이희호 여사)와 기념사진을 찍었다며 내가 간첩단 사건에 연루된 것처럼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북풍과 공안정국을 일으켜 여당 후보인 YS에게 유리하도록 판을 흔들려는 불순한 의도였다. 대선이 끝나자 요란하던 간첩단 사건은 흐지부지 자취를 감춰버렸다. 나에게 색깔을 덧씌우기 위해 기획된 ‘북풍(北風)몰이’라는 방증이었다.

초원복집 사건…“김영삼 끝났다”

정계 은퇴 선언 후 영국 체류 시절인 1993년 3월 찾아온 가족·지인과 함께 찍은 기념 사진. 왼쪽부터 신용석 민주당 지구당위원장, 김대성 비서실 차장, DJ, 장남 김홍일씨, 탤런트 정한용씨. [사진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정계 은퇴 선언 후 영국 체류 시절인 1993년 3월 찾아온 가족·지인과 함께 찍은 기념 사진. 왼쪽부터 신용석 민주당 지구당위원장, 김대성 비서실 차장, DJ, 장남 김홍일씨, 탤런트 정한용씨. [사진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당시만 해도 색깔론과 북풍몰이는 약효가 있었다. YS 측은 나에게 사상 공세를 펼쳤다. 그들은 지난 87년 대선 때도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면 군부가 들고 일어난다”고 선동했다.

YS는 나와 함께 민주화 투쟁을 했다. 나는 합법적인 정당의 대통령 후보였다. 그런 나에게 “사상이 의심스러운 후보는 대통령이 돼서는 안 된다” “색깔이 분명치 않은 정당에 정권을 맡겨서 무엇을 하자는 것이냐”며 용공으로 몰았다. 민주화 동지로서 참담했다.

대선 사흘 전에는 정주영의 국민당이 폭로한 ‘부산 초원복국 사건’이 터졌다. 투표 1주일 전인 12월 11일 부산 ‘초원즉석복국’에서 김기춘 전 법무부 장관과 부산시장을 포함한 지역 기관장들이 모여 YS에 대한 지원을 논의했다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 “우리가 남이가, 이번에 안 되면 영도다리에 빠져 죽자” 등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발언을 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그 소식을 듣고 나는 “이제 YS는 끝났다”고 예단했다. 그런데 돌아가는 게 이상했다. 많은 언론은 “우리가 남이가” 등 지역주의를 부추긴 핵심 문제는 쏙 빼놓은 채 “왜 도청을 했냐”며 정주영 측에게 불법의 책임을 전가했다.

관권 개입 의혹은 온데간데없고 오히려 영남 사람들을 더 뭉치게 했다. 교묘한 정보정치에 언론이 가세한 결과였다. 나에게도 역풍이 불었다.

“받아서는 안 될 노태우 돈”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94년 6월 방북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왼쪽)이 평양 대동강변에서 북한 김일성(오른쪽)과 대화하고 있다. [중앙포토]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94년 6월 방북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왼쪽)이 평양 대동강변에서 북한 김일성(오른쪽)과 대화하고 있다. [중앙포토]

개표 결과 나는 800만 표를 얻는 데 그쳤다. 김영삼 42%, 김대중 34%, 정주영 16%였다. 세 번째 도전에서도 선택을 받지 못했다. 나는 절망했다. 68세 나이, 이제 그만둬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패배가 확정된 새벽, 아내에게 말했다.

“국민의 마음을 얻는 데 실패했소. 내가 할 일은 여기까지인 것 같소.”

아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아침,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저는 오늘로써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평범한 시민이 되겠습니다. 40년의 파란 많았던 정치 생활에 사실상 종막을 고합니다.”

대선 과정에서 고백할 게 하나 있다. 당시 나는 노태우 대통령에게 돈을 받은 적이 있다. 김중권 청와대 정무수석이 가지고 왔다. 김 수석은 “노 대통령이 다른 후보에게도 인사를 다 했다”고 전했다.

그때 나는 선거 자금이 있었기 때문에 꼭 그 돈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때는 정치자금법이 없어 법적으로 걸릴 일도 아니었다. 대통령이 다 준다는데 체면상 안 받기도 그러한 상황이었다. 훗날 95년 ‘노태우 비자금 사건’이 터진 직후 나는 자진해서 공개했다.

국민의 심판에 맡기겠다는 각오로 밝힌 거였다. 받아서는 안 될 돈이었다. 돈과 관련된 추문이다 보니 부끄러운 일이었다. (※노태우 비자금 사건이 불거진 95년 10월 27일 중국 베이징에서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총재를 수행한 임채정 의원은 ‘20억원’이라고 했다)

동독인은 불행한 독일 통일의 교훈

심란한 기분을 전환하고 인생을 되돌아보고 싶었다. 철학자들은 ‘퇴수(退修)’라는 표현을 쓴다. 뒤로 물러나서 자신을 닦는다는 의미다. 예수가 광야에서, 부처가 보리수 밑에서, 공자가 천하를 돌다가 물러나서 제자를 가르치는 것과 같다.

93년 1월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으로 떠나 연구활동을 했다. 독일 통일(90년 10월) 직후였기에 베를린을 방문해 학자들과 통독 과정과 한반도 통일 방향에 대해 논의할 기회가 있었다. 기억에 남는 대화 한 토막을 소개한다.

김영옥 기자

김영옥 기자

(독일 학자) “서독이 동독과 통일할 때 2000억 마르크(당시 환율 기준 120조원)만 있으면 된다고 했는데, 10배나 더 들었습니다. 동독 경제가 그렇게 한심하게 망가진 줄 몰랐습니다.”

(DJ) “도저히 이해가 안 됩니다. 어째서 몰랐습니까?”

(독일 학자) “공산주의 정권의 ‘캄푸라치(Camouflage, 위장) 전술’이 그리 교묘했습니다.”

같은 민족이니 통일만 하면 다 잘 될 줄 알았다. 그러나 통일 후 동독인들은 행복하지 않았다. 동독 시절에는 공부도, 집도, 전기·수도도 다 공짜였다. 일자리가 없이 놀아도 월급이 나왔다.

통일 이후엔 집과 직장을 직접 찾고, 자식 교육비를 마련하고, 전기·수도 요금을 내야 하니 힘들어서 못 살겠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동·서독인 사이에 서로에 대한 갈등과 증오가 쌓였다. 서독의 흡수통일이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 우리도 북한과 통일에 대비해 독일 사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북핵 위기 해소한 카터 방북 첫 제안

영국 체류 중 한반도 정세가 급변하고 있었다.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특별사찰을 요구하자 93년 3월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했다. 이국땅에서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반년 만에 영국 생활을 끝내고 그해 7월 서울로 돌아왔다.

북한은 미국이 북한의 정권 교체를 노린다는 위기감을 가졌다. 북한은 “핵무기를 보유하면 우리를 함부로 못 친다”고 판단했다. 미국과 소련 관계에서 배웠다. 핵무기를 보유한 미국과 소련이 서로를 공격할 수 없는 ‘공포의 균형’을 이뤘다는 점에 착안했다.

북핵 위기가 94년 들어 더욱 고조됐다. 북한 영변 핵시설에 대한 미국의 폭격설이 돌았다.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돌았다.

당시 위기 해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지미 카터 전 미 대통령의 방북을 처음으로 제안한 사람은 나였다. 나는 5월 12일 미국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 ‘북한 핵 야심 포기와 안보 보장’을 제기하며 미국과 북한의 협상을 촉구했다. 그 방안으로 김일성 주석과 대화가 가능한 인물을 평양에 파견하자고 주장하며, “카터가 적임자”라고 거명했다.

연설 전날 밤, 카터에게 전화를 걸어 미리 양해를 구했다. “내일 연설하는데 북한 특사 관련 질문이 나오면 당신이 가는 게 좋겠다고 말해도 되겠습니까?” 카터는 흔쾌히 동의했다.

빌 클린턴 행정부가 움직였다. 6월 15~18일 카터를 북한에 보내 김일성으로부터 핵 개발 동결 약속을 받아냈다. 카터는 ‘남북 정상회담’이란 선물 보따리도 가지고 판문점을 넘어왔다.

김일성 사망에 설익은 통일 낙관론

김대중 육성 회고록 19

김대중 육성 회고록 19

남북 관계가 급진전하면서 김영삼·김일성의 남북 정상회담이 7월 25~27일로 정해졌다. 화해 무드가 조성되던 중 김일성이 7월 8일 갑자기 사망했다.

김영삼 정부는 김일성이 죽었으니 잘 됐고, 북한 붕괴는 시간문제로 곧 통일된다는 아마추어적 사고를 했다. 이런 설익은 인식은 북한을 격노하게 했고, 내부 결속을 강화했다.

개인적으로 나는 김일성 때문에 고생했다. 그가 생전에 북한에서 궐기대회를 통해 “남쪽 김대중을 지지하라”고 하는 바람에 나를 굉장히 어렵게 만들었다. 하도 답답해서 북한과 인연이 있는 일본의 우쓰노미야 도쿠마(宇都宮德馬) 의원에게 편지를 쓴 적이 있다.

“제발 그런 짓 좀 하지 말아 달라”고 통사정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빨간 넥타이만 매도 사상이 이상하다고 공격을 받던 시절이다.

더중앙플러스에서 연재 중인 ‘김대중 육성 회고록’ 전문은 QR코드를 스캔하면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83620

20회 〈DJP 연합의 내막〉이 이어집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Innovation La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