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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당 1000불"…기술도 빼가고 정신도 빼가는 '치명적 유혹'

중앙일보

입력

“인터뷰는 유선으로 진행되며 시간당 미화 400달러를 보상해 드릴 예정입니다.”

국내 마케팅 회사에서 일하는 A씨는 지난해 9월 의문의 이메일을 받았다. 자신들이 던지는 질문에 전화로 답을 해주면 시간당 50만원이 넘는 돈을 준다는 내용이었다. 순간 신종 사기를 의심했지만, 메일을 보낸 이는 해외에 본사를 둔 자문중개업체였다. 전문 지식이 필요한 기업들과 산업 전문가 집단을 이어주는 신종 기업이다. 자문중개업체는 A씨에게 ‘홈케어 산업의 전망’에 대해 물어봤지만 A씨는 고심 끝에 답변을 거부했다. “질문은 평범했지만 자칫 산업 스파이가 되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이 있었다”고 털어놨다.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 입구의 모습. 연합뉴스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 입구의 모습. 연합뉴스

A씨의 경우와 달리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자문중개업체에 컨설팅 명목으로 돈을 받고 핵심기술을 건넨 경우도 있다.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정보기술범죄수사부(부장 이성범)는 지난 16일 LG에너지솔루션 전직 임원급 간부 정모(50)씨를 산업기술보호법 위반·부정경쟁방지법 위반 등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자문중개업체를 이용해 영업비밀이 누출된 사실이 적발된 사건은 이번이 처음이다. 정씨는 LG에너지솔루션 재직중이던 2021년 5월부터 2022년 3월 회사의 2차 전지 관련 영업비밀 16건을 촬영해 넘기고, 2021년 4월부터 2022년 4월까지 자문중개업체를 통해 유료자문 형식으로 회사의 영업비밀을 24건 누설한 혐의를 받고 있다.

“시간당 50만원”…기술유출 통로 떠오른 자문중개업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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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씨는 LG그룹에서 2차 전지 사업에 20년 이상 종사해 온 핵심 인력이었다. 포항공대를 졸업하고 2002년 LG CNS에서 입사한 뒤 LG화학 자동차전지사업부와 LG에너지솔루션 사업개발담당 등을 거친 LG맨이었다.

그런 정씨가 자문중개업체의 미끼에 걸려든 건 2020년이었다. 처음에는 비밀스런 정보가 아닌 단순 지식만으로도 소화 가능한 질문이었다고 한다. 그러자 자문중개업체는 시간당 자문료를 올리면서 LG에너지솔루션 직원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계약 현황, 2차 전지 연구 동향, 생산라인 현황 등에 대한 정보를 요구했다. 여기에는 국가 핵심기술도 포함됐다. 정씨는 구두 자문에 대해선 시간당 평균 1000달러, 서면 자문의 경우 건당 최소 3000달러를 받았다.

정씨의 비행을 까맣게 몰랐던 LG에너지솔루션은 정씨의 기밀누설을 보다못한 자문중개업체 내부자의 신고로 그제야 상황을 알아차렸다고 한다. 정씨의 이메일과 사내 메신저 기록, 정씨가 그동안 접근한 회사 내부 자료에 대한 기록 등을 확인한 결과 기술유출 정황이 명백했다. LG에너지솔루션은 지난해 7월 영리 목적의 자문행위를 금지하는 내부 공지를 띄우고 자문중개업체에 “우리 직원을 접촉하지 마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정씨는 동생의 주민등록증을 변조해 가명을 만들고는 자문중개업체의 컨설팅 요청에 계속 응했다. 자문료 역시 시간당 6000달러까지 끌어올렸다. 정씨는 결국 지난해 10월에 해고되고 LG에너지솔루션은 정씨를 검찰에 고발했다.

자문 내역 중 7.5%만 범죄사실 특정…제보 없이 파악 어려워  

연도별 산업기술·영업비밀 해외유출 적발 현황.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연도별 산업기술·영업비밀 해외유출 적발 현황.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자문중개업체를 통한 영업비밀 유출은 내부 제보가 아니고선 여간해선 드러나기 어렵다. 자문중개업체에 자문을 의뢰한 업체의 정보는 자문을 제공한 사람도 알 수 없고, 자문도 컨퍼런스 콜 형태여서 내용이 남지 않는다. 정씨가 유출한 영업비밀과 국가핵심기술이 어느 기업, 어느 나라로 흘러갔는지는 현재도 파악되지 않았다.

자문중개업체들이 해외에 서버를 두고 있는 점도 수사의 제약요인이다. 검찰이 산업기술보호법 위반·부정경쟁방지법 위반 혐의로 기소한 범죄 사실은 정씨의 전체 자문 320건 중 7.5%(24건)에 불과하다. 검찰 관계자는 “정씨가 자문 의뢰를 받은 질문 리스트, 자문료를 받기 전 열람한 내부 서류 등을 종합해서 영업 비밀 유출이 확실한 사례만 범죄 사실로 특정했다”고 설명했다.

“첨단 기술유출에 대한 형량이 낮다”는 비판도 상당하다.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지난 8일 지식재산권범죄 양형기준 수정안을 심의하며 ▶️국가핵심기술 국외 유출·침해 ▶️전략기술 국외·국내 침해 ▶️부정경쟁행위 등의 양형기준을 추가로 설정하기로 했다. 새롭게 적용되는 기술유출 범죄에 대한 권고 형량 범위와 양형 인자는 내년 3월에 최종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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