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위기인데… 역대급 호황으로 북적인다는 중국의 ‘이곳’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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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경제 대공황은 할리우드 영화가 도약하던 시기였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인 2009년 미국 박스오피스의 티켓 판매량과 관객 수는 근래 20년 중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앞선 사례는 경제가 암담해 소비가 침체되는 상황에서 적은 비용으로 유희를 즐기는 방법이 ‘영화 관람’이라는 해석이 꽤 설득력 있는 주장임을 뒷받침한다. 경기 불황기에 저비용으로 심리적 만족감을 높여주는 립스틱이 잘 팔린다는 경제학 용어인 ‘립스틱 효과’가 영화에도 적용되는 걸까.

여름 성수기(6~8월) 중국 박스오피스 최고 실적은 코로나 19가 발생하기 직전인 2019년의 177억 위안(약 3조 2267억 원)이었다. 그러나 올해는 박스오피스 매출이 8월 11일 기준, 이미 160억 위안(약 2조 9120억 원)을 넘어섰다. 업계는 여름 성수기에만 180억 위안(약 3조 2814억 원) 이상의 실적을 기록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부동산 개발업체 비구이위안(碧桂園·컨트리가든)발 부동산 시장 위기와 디플레이션(물가 하락)으로 이중고를 겪고 있는 중국도 영화 산업에서 ‘립스틱 효과’를 보고 있는 걸까.

우선 극장에 볼 영화가 많다. 코로나 19 방역 조치가 해제된 올해 상반기에만 총 254편의 영화가 개봉했다. 2022년 동기 대비 83편 증가한 수치다. 그러나 단순히 영화가 많이 개봉했다고 해서 극장에 가는 건 아니다.

올여름 중국 극장가의 흥행 키워드는 ‘입소문’이다. 현재 예매 상위권을 점유하고 있는 영화들은 개봉 후에는 오히려 성적이 주춤하다가 지표가 상승하는 추세를 보였다. 가장 많이 언급되고 있는 ‘사라진 그녀(消失的她)’는 서스펜스 범죄 영화로 사오나오쥐(燒腦劇, 燒腦:골머리를 앓는+劇:연극)로 통한다. 사오나오쥐는 방대하고 전문적인 지식을 축적해야만 줄거리 이해가 가능한 작품을 뜻하는데 1회가 아닌 여러 차례 영화를 보러 간다는 N차 관람을 이끈다는 특징이 있다.

중국 박스오피스 여름 성수기 시즌 흥행작 '사라진 그녀(消失的?)의 공식 포스터

중국 박스오피스 여름 성수기 시즌 흥행작 '사라진 그녀(消失的?)의 공식 포스터

‘장안삼만리(長安三萬浬)’는 중국적 요소에 탄탄한 스토리, 그리고 괄목할 만큼 성장한 애니메이션의 기술(품질)이 입소문을 탄 사례다. ‘팔각롱중(八角籠中)’은 실화를 기반으로 한 영화로 주인공이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가난한 시골 아이들을 데려다 공부와 권투를 가르쳐 챔피언으로 이끄는 내용이다. 혈연관계가 아닌 아이들이 함께 지내며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이 또 하나의 관전 포인트인데, 출연 배우의 연기가 몰입을 높인다는 평가가 이어진다. 판타지 3부작 중 1부인 ‘봉신(封神) 제1부’ 등도 만듦새가 뛰어나고 스토리가 탄탄하다는 입소문이 돌며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다.

중국 애니메이션 '장안삼만리(長安三萬浬)' 공식 스틸컷

중국 애니메이션 '장안삼만리(長安三萬浬)' 공식 스틸컷

영화 팔각롱중(八角籠中) 공식 포스터

영화 팔각롱중(八角籠中) 공식 포스터

중국 관객이 할리우드의 ‘슈퍼히어로’나 액션으로 가득한 ‘블록버스터’ 영화에 기시감을 느끼고 있다는 지표도 포착된다. 2019년 중국 박스오피스의 할리우드 영화 점유율은 43.7%에 달했으나, 올 상반기는 16%로 크게 떨어졌다. 올여름 개봉한 톰 크루즈 주연의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 파트 원'은 개봉 15일 차에 3억 위안을 돌파했으나, 중국 영화인 ‘사라진 그녀(消失的她)’는 하루 만에 3억 위안을 넘어섰다. 미션 임파서블의 기대 이하 흥행에 7월 20일,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은 ‘톰 크루즈조차 중국 영화 팬들이 할리우드 영화를 보도록 유혹할 수 없다’고 보도했다.

2023년 7월 20일,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에 실린 기사.

2023년 7월 20일,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에 실린 기사.

미국의 영화 산업 컨설팅 회사인 아티잔 게이트웨이(Artisan Gateway)의 데이터에 따르면 올 상반기 할리우드 영화의 중국 내 총 흥행 수익은 5억 9200만 달러(약 7944억 원)에 그친 것으로 나타났다. 할리우드 영화의 흥행 비중도 2019년 상반기 43.7%에서 올해 상반기 16%로 떨어졌다.

이런 현상을 두고 화샤필름 CEO 푸뤄칭(傅若清)은 “중국영화 주류 관객은 지난 20년간 성장해왔다”며 “중국인에 대한 이야기, 현실, 주변 사물에 대한 공감과 공명에 대한 요구가 더 커졌다”고 말했다.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룬 중국이 국가적 자신감을 되찾게 되면서 외국 문화에 대한 동경이 줄어들었다는 분석이다. 최근 몇 년 사이 중국 산업 전반에 불었던 ‘궈차오(國潮, 애국주의 소비)’ 열풍이 영화에도 일부 적용된 것. 또, 할리우드 영화의 오래된 IP, 뻔한 플롯 등에 더는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는 분석도 이어진다.

2008년 이후 중국의 GDP 성장률은 두 자릿수에서 한 자릿수로 떨어졌지만 2008년부터 2015년까지 중국 영화 박스오피스는 이전 100억 위안 미만에서 2016년 400억 위안 안팎으로 전례 없는 높은 성장을 기록했다. 중국 부동산 개발 업체의 디폴트(채무 불이행) 위기가 금융권으로 확산하면서 ‘중국판 리먼브러더스 사태’가 터질 것이라는 우려가 줄을 잇는 가운데, 중국 영화 산업은 역으로 몸집을 키우게 될까. 올해 중국 박스오피스의 최종 성적표가 기다려진다.

임서영 차이나랩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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