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들이 잘못된 길로 간다면 기탄없이 쓴소리를 해달라.”
윤석열 대통령의 부친인 고(故) 윤기중 연세대 응용통계학과 명예교수가 지난해 오랜 지인인 이종찬 광복회장에게 전한 말이다. 이 회장은 중앙일보에 “고인은 그 누구보다 아들을 사랑했고, 평생 학문을 연구한 존경받는 학자였다”고 말했다.
윤기중 연세대 명예교수가 15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92세. 윤 교수는 최근 건강이 악화돼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윤 대통령은 이날 광복절 경축식을 마친 뒤 병원을 찾아 부친의 임종을 지켰다. 고인의 빈소는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마련됐다. 유족은 부인 최성자(89) 전 이화여대 교수와 아들 윤 대통령, 딸 신원씨가 있다.
김은혜 홍보수석은 이날 브리핑에서 “윤 대통령은 국정 공백이 없도록 장례를 가족장으로 치르기로 해 조화와 조문을 사양한다”며 “애도를 표해준 국민 여러분에게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고 밝혔다. 윤 대통령은 3일 가족장을 마친 뒤 18일 미국 캠프 데이비드에서 열리는 한·미·일 정상회의를 위해 17일 출국한다. 윤 대통령은 전날 늦은 밤까지도 참모진에게 아버지의 병환을 내색하지 않은 채 광복절 경축사를 준비했다고 한다.
윤 교수의 지인과 제자들은 고인을 ‘대통령 부친’이 아닌 ‘학자 윤기중’으로 기억했다. 윤 교수는 한국 통계학의 태두로 불리는 석학이었다. 1931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공주농고를 거쳐 연세대 경제학과(1956년)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석사 학위(1958년)를 받았다. 한양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한·일 수교 직후인 1967년 일본 문부성 국비 장학생 1호로 선발돼 일본 히토쓰바시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1968년 귀국 뒤 연세대 상경대학 교수로 부임했고 1997년까지 강단에 섰다. 그의 제자인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명강의로 소문이 자자해 당시 윤 교수님의 수업을 듣기 위한 경쟁이 정말 치열했다”고 말했다.
윤 교수는 경제 현상을 통계학적으로 해석하는 연구를 바탕으로 통계학뿐 아니라 경제학계에도 업적을 남겼다. 한국통계학회장(1977~1979년)과 한국경제학회장(1992~1993)을 역임했고, 『통계학』(1965), 『수리통계학』(1974), 『통계학개론』(1983) 등을 집필했다. 교수가 된 뒤에도 연구에 끈을 놓지 않았는데, 특히 자본주의 시장의 불평등에 천착해 ‘성장과 소득불평등도의 국제비교’(1984) ‘한국경제 불평등 분석’(1997) 등의 논문을 남겼다.
윤 교수는 정년 퇴임 뒤에도 “공부가 중요하다”는 소신을 지키며 연구를 이어갔다. 최근 건강이 악화되기 전까진 거의 매일 연세대 명예교수실로 ‘출근’을 했다고 한다. 한 연세대 관계자는 “4~5명의 명예교수가 함께 쓰는 사무실이지만, 매일 나온 건 윤 교수님이 유일했다”고 말했다. 윤 교수는 70대 후반이던 2005년과 2008년엔 영국 경제학자 윌리엄 페티의 저서인 『페티의 경제학』과 영국 통계학자 존 그라운트의 저서 『사망표의 제관찰』번역서를 출간했다. 불과 3년 전인 2020년엔 대한민국학술원 논문집에 ‘중상주의 경제정책에 관한 연구’란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올해 초 대한민국학술원 행사도 참석했다.
윤 교수는 꼿꼿한 성품으로 유명했다. 고인이 대학을 다니던 시절엔 석사 학위만으로 교수가 될 수 있었다. 대신 간단한 논문만 쓰면 박사학위를 주는 ‘구제(舊制) 박사’ 제도가 있었다. 하지만 윤 교수는 “나눠주는 박사가 무슨 쓸 데가 있나. 공부가 중요하다”며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
윤 대통령의 오랜 친구인 이철우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윤 교수님의 명예교수실 책상이 너무 작아 여러 번 바꿔드린다고 했지만, 한사코 거절하셨다”고 말했다. 지난해 윤 대통령이 당선인 시절, 윤 교수가 잠시 병원에 입원한 일이 있었다. 당시도 윤 교수는 “어떤 혜택이나 특혜를 원치 않는다”고 완강히 말했고, 이같은 보고를 받은 윤 대통령은 “우리 아버지는 원래 그런 분이니 내버려 두셔야 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윤 교수는 70대 후반까지도 자신의 스승이었던 고(故) 최호진 교수를 매달 한차례 찾아뵙고 식사를 대접했다. 윤 교수의 제자인 홍성찬 연세대 명예교수는 “윤 교수님을 보며 스승을 저렇게 모셔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홍 교수는 또 “윤 교수님은 지방에서 올라온 저에게 소아과의 위치까지 말씀해주시던 분이셨다”며 “저에겐 부모와도 같았다”고 말했다. 연세대 내에서 오랜 기간 자영업을 했던 이모씨도 “윤 교수님은 저한테도 종종 식사했는지 안부를 물으시며 격려해 주셨다”며 “제자를 무척 아끼시고 반가워하는 모습이 인상에 남는다”고 말했다.
윤 교수는 엄한 아버지였다. 윤 대통령이 유년 시절 콩서리를 하자 고무호스로 종아리를 때렸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러면서도 따뜻한 아버지였다. 윤 대통령은 박근혜 정부 당시 국정원 댓글수사, 문재인 정부 당시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수사 등 검사로서 어려움에 부딪힐 때마다 윤 교수에게 조언을 구했다고 한다. 윤 교수의 한 지인은 “심지가 강한 분이셨는데, 아들이 대선에 출마했을 때는 밤잠을 설치는 것 같았다”고 전했다.
하지만 윤 교수는 아들이 고비를 겪을 때도 주변 사람에게 윤 대통령만을 두둔하지 않았다. 생각이 다른 사람을 만나 경청하는 경우가 잦았다. 이철우 교수는 “조국 사태 당시 윤 교수님을 모시고 점심을 하러 가다 당시 광화문 집회를 스쳐 간 적이 있었다. 윤 교수님은 ‘나라가 갈라져 큰일이다’며 아들보다 나라를 먼저 걱정했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의 오랜 지인은 “오늘날 강직한 윤 대통령을 만든 9할은 윤 교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말했다. 윤 교수가 윤 대통령의 서울대 법대 입학 기념으로 선물한 밀턴 프리드먼의 저서 『선택할 자유』는 윤 대통령의 철학을 정립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친 책으로 꼽힌다.
윤 대통령은 대통령에 취임한 후인 지난해 7월 아버지를 대통령실 청사로 초대해 저녁 식사를 했다. 당시 윤 교수는 윤 대통령에게 국민만을 바라봐야 한다고 조언했다고 한다. 윤 대통령은 재임 중 종종 아버지와의 추억을 떠올렸다. 지난 2월 연세대 졸업식 축사에선 “아버지 연구실에서 방학 숙제를 하고 수학 문제도 풀었다. 아름다운 연세의 교정에서 고민과 사색에 흠뻑 빠졌고 많은 연세인과 각별한 우정을 나눴다”고 말했다. 3월 일본 요미우리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윤 대통령은 “아직도 히토쓰바시 대학이 있는 구니타치시의 거리가 눈에 선하다”며 “우에노 역에서 기차를 타고 구니타치역에서 내려 아버지의 아파트로 갔다”고 말했다.
대통령실 등에 따르면 이날 윤 교수는 윤 대통령 도착 20분 뒤에 별세했다고 한다. 윤 교수가 의식이 있을 때 윤 대통령에게 마지막으로 전한 말은 “잘 자라줘서 고맙다”였다. 임종 직전이 아닌 최근 의식 있을 때 당부한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