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년 전의 ‘정치전’ 개념 다시 등장하는 이유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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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전(political warfare)은 국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전쟁을 제외한 모든 국가 수단을 동원하는 것이다. 셔터스톡

?정치전(political warfare)은 국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전쟁을 제외한 모든 국가 수단을 동원하는 것이다. 셔터스톡

소련은 공식적 정부와 비공식적 정부가 있다. 전자는 국제 외교에 참여하는 반면 후자는 자본주의 국가들의 체제 자신감을 훼손하고 국방 정책을 방해하며 사회와 산업 영역에서 불안을 증가시키고 모든 형태의 분열을 조장하려 한다.

1946년 2월 22일, 소련 모스크바에서 근무하던 미국 외교관 조지 케넌이 미 국무부에 5000단어가 넘는 보고문을 보내왔다. ‘긴 전문(Long Telegram)’이라고 불리는 보고서에서 케넌은 소련의 침략적 대외 전략을 밝혔다. 그해 3월 윈스턴 처칠이 한 그 유명한 ‘철의 장막’ 연설보다 앞선 것이었다. 소련의 의도에 대해 모호해 하던 미국은 케넌이 언급한 ‘봉쇄(containment)’라는 대 소련 전략을 채택했고 냉전이 본격화하는 계기가 됐다. 케넌은 훗날 자신이 제안했던 봉쇄 전략이 단순히 군사적 의미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념적, 정치적 위협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시진핑(習近平) 정권이 들어서고 미·중 관계가 협력에서 경쟁 구도로 바뀌자 비슷한 내용의 기고문들이 등장했다. 2021년엔 아예 제목을 ‘더 긴 전문(The Longer Telelgram)’이라고 붙인 글이 나왔다. 중국에 대해 깊은 경험과 전문성을 가진 전직 고위 관료로 추정되는 저자는 시진핑의 중국을 더이상 덩샤오핑(鄧小平) 이후의 현상 유지(status quo) 국가가 아니라고 단언했다.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주의 국제질서에 근본적이고 중대한 도전을 모색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중국이 미국에 대해 단일한 내부 전략을 가지고 대응하고 있는 것에 비해 미국은 통일된 대 중국 전략을 가지지 못했다고 비판하며 이를 ‘국가적인 책임의 직무유기(a dereliction of national responsibility),’ ‘정치적 관성과 전략적 표류라는 치명적인 칵테일(lethal cocktail of political inertia and strategic drift)’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면서 미국은 중국의 국가 전략의 목적뿐만 아니라 중국 정책 행동의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명확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케넌이 역설한 ‘이념적, 정치적 위협에 대한 대항,’ ‘더 긴 전문’이 비판한 전략적 표류에 대한 응답 성격의 보고서가 최근 나왔다. 미국의 저명한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가 중국의 ‘정치전’ 전략을 포괄적으로 분석한 145쪽 분량의 글을 지난 2일 발표했다.

보고서는 케넌의 다음과 같은 언급을 인용한다.

정치전(political warfare)은 국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전쟁을 제외한 모든 국가 수단을 동원하는 것이다.

CSIS는 “중국은 무력 충돌의 임계점에서 중국 공산당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미국과 동맹국을 약화시키기 위해 전례 없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고 밝혔다. 캠페인은 정교한 스파이 활동, 공격적인 사이버 작전, 소셜 미디어 플랫폼을 이용한 허위 정보 확산, 경제 압박, 기업과 대학 및 기타 조직에 대한 영향력 행사 등을 포함한다. 보고서는 이를 ‘정치전’이라 명명하고 중국 당국이 시행하는 정치전의 목적, 주요 전술, 미국과 동맹국의 대응 방안 등을 논의하고 있다.

보고서에 의하면 중국 당국은 미국 학술 기관, 기업, 정부 기관 및 비정부기구(NGO)에 광범위하게 침투했다. CSIS가 인터뷰한 연방수사국(FBI) 고위 관계자에 따르면 중국은 미국 안팎에서 전례 없는 규모로 정보를 수집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CSIS는 보고서에서 “중국 당국이 벌이는 정치전의 주요 대상은 미국”이라고 분석했다. 정치전의 전술로는 정보 수집, 사이버전, 정보 및 허위 정보 작전, 통일전선 공작, 비정규 군사 행동, 경제 압박 등이 있다. 중국 인민해방군, 국가안전부, 공안부, 공업신식화부, 통일전선공작부, 외교부 등 중국 당국의 여러 부서가 이러한 작전을 동시에 주도하는 경우가 많다. 공업신식화부는 산업, 에너지, 정보통신, 중소기업 정책 등을 담당하는 중국 중앙정부 부처다.

중국 당국이 정치전을 전개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공산당의 통치를 유지하는 것이다. 또 세력 균형 경쟁의 일환으로 중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미국과 동맹 세력을 약화시키는 목적도 가지고 있다.

CSIS는 “그러나 미국과 동맹국은 중국 당국의 정치전을 신속하게 파악하고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며 중국의 이런 공작에 공개적으로 대처할 것을 미국과 동맹국에 촉구했다. 구체적인 권고 사항으론 미국 연방 차원에서 방첩 자원을 늘리고 주 정부 차원의 방첩 활동을 확대하며 외국 ‘에이전트 등록법(FARA)’ 집행을 강화하는 것 등이 있다.

CSIS는 또 미국이 중국 당국의 ‘만리장성’ 인터넷 방화벽을 약화시키고, 중국의 경제적 강압에 대응하기 위한 다자외교 관계를 구축하며, 신흥 기술에 대한 민간 부문의 경쟁력을 향상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중국 당국의 정치전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것을 권고했다. 정부보다 민간에서 신냉전을 준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미국 분위기다.

차이나랩 이충형 특임기자(중국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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